▲유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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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오 박사'로도 많이 불리는 유진오는 법률가뿐만 아니라 야당 총재로도 유명한 인물이다. 1965년에 민중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적도 있고, 1967년부터 신민당 총재로서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반대하는 투쟁을 벌인 적도 있다. 양김 시대 혹은 3김 시대가 개막되기 직전에 야당 지도자를 지냈던 인물이다.
야당 지도자가 되기 전에 유진오는 '대한민국 헌법의 아버지'로 더욱더 유명했다. 1948년에 국회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헌법기초위원회는 유진오의 초안을 원안으로 삼고 권승렬의 초안을 참고안으로 해 헌법안 심의를 진행했다. 그러니까 유진오 초안을 중심으로 헌법제정이 진행됐던 것이다. 유진오는 7월 17일이 제헌절이 되도록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이다.
그랬기 때문에, 1948년 헌법의 상당 부분은 유진오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후 아홉 차례 개정된 역대 헌법은 모두 1948년 헌법을 계승한 것이다. 따라서 헌법의 내용이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지금의 헌법(1987년 헌법) 속에도 유진오의 숨결이 살아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초안을 중심으로 헌법제정 작업을 진행했다는 점 외에, 유진오는 또 다른 측면에서 한국의 헌정 질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대통령제 국가라서 총리 제도가 불필요한 대한민국에서 허수아비 총리, 방탄 총리를 두게 된 배경도 바로 이 유진오한테서 발견할 수 있다.
헌법기초위원회의 작업을 지켜보던 1948년의 미군정과 이승만 국회의장은 유진오 초안 중 일부 조문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총리 중심의 의원내각제였다. 미군정과 이승만은 대통령제를 선호했던 것이다.
그래서 미군정과 이승만은 유진오 초안이 국회 본회의에 상정되기 직전에 제동을 걸었다. 권력을 가진 쪽이 이렇게 나왔기 때문에, 유진오 초안은 그쪽 요구대로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제를 넣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유진오 초안과 이승만 수정안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타협적인 절충이 이루어졌다. 유진오 초안에 있던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지 않는 대신,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남겨두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국무총리 제도였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제에 불필요한 총리 제도가 우리 헌법에 들어가게 되었다.
총리 제도는 일본 같은 의원내각제나 프랑스 같은 이원집정부제(대통령제+의원내각제)에서는 꼭 필요하다. 하지만, 한국 같은 대통령제에서는 불필요한 제도다. 그런데도 이것이 우리 헌법에 규정된 것은 유진오 초안과 이승만 수정안이 절충된 결과였다. 이처럼 유진오는 의미 없는 총리 제도를 탄생시키는 데도 일정 정도 기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