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 중인 단원고 희생자 김유민양의 아버지 김영오씨가 9일 저녁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세월호 특별법 제정 촉구 촛불문화제에 참석해 촛불을 밝히고 있다.
남소연
11일은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지 118일째, 세월호 유가족이 수사권, 기소권이 포함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단식을 시작한 지 29일째 되는 날이다. 며칠 전, 여야 원내대표는 세월호 특별법과 관련해 수사권과 기소권을 진상조사위원회에 부여하지 않고 따로 특별검사를 임명해 조사를 진행하도록 하며, 특별검사의 추천도 현행 '특별검사의 임명 등에 관한 법률'대로 한다는 내용으로 합의했음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유가족은 물론 각계각층 시민들의 반발이 거세지자 새정치민주연합은 11일 밤 의원총회를 통해 재협상을 결정했다.
새정치연합측이 재협상을 결정하긴 했지만, 앞서 여야가 합의한 특별법 내용은 세월호 유가족들과 시민들이 끊임없이 요구했던, 성역 없는 조사를 할 수 있는 독립적인 진상조사위원회 설립과는 거리가 멀다.
세월호 가족들은 8월 9일부터 새정치민주연합 당사 사무실에서 여야 밀실 야합 철회를 촉구하는 항의행동을 이어가고 있으며 새누리당 당사 앞에서도 1인시위를 진행하고 있다.
참사가 일어난 후 지금까지, 세월호 유가족들은 진실을 밝히겠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호소하고 활동하며 유래 없는 결과를 얻었다. 수사권, 기소권이 포함된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해 한국 역사상 가장 짧은 시간 내에 400만 명에 가까운 서명을 받았으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위해서라면 검찰의 영역으로만 생각되었던 기소권이 독립적인 진상조사위원회에 주어져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해외에서도 대형 참사의 진상조사를 이끌어내는 힘은 이처럼 유가족들과 시민들로부터 나왔다. 참사의 진상을 규명하는 것은 유가족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시작이자 제2의, 제3의 세월호 참사를 막을 수 있는 첫 번째 단계다.
9·11 국가위원회, 테러 발생 14개월 뒤에야 설립2001년, 3000여 명이 사망한 9·11 테러의 진상을 조사하기 위해 설립된 9·11 국가위원회의 공식 명칭은 '미국 테러 공격에 대한 국가위원회(The National Commission on Terrorist Attacks Upon the United States)'다. 9·11 국가위원회는 세월호 특별법처럼 미국 공법(Public Law) 107-306에 의해 9·11 테러가 일어난 지 약 14개월 뒤인 2002년 11월 27일에 설립되었다.
조사위원은 여당 추천 5명, 야당 추천 5명의 전문가들로 구성되었으며 위원장은 대통령이, 부위원장은 야당이 임명했다. 위원회는 약 20개월 동안 활동하며 12차례의 청문회 개최, 1200여 명의 관계자 인터뷰, 250만 페이지에 달하는 문서를 분석했으며 그 결과 약 2만 페이지에 달하는 결과 보고서를 2004년 7월에 발표했다.
9·11 국가위원회가 설립되는 데는 유가족들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특히 12명의 유가족들로 구성된 '9·11 독립위원회를 위한 가족운영위원회'(Family Steering Committee for the 9/11 Independent Commission)는 사고가 일어난 후부터 독립적인 진상조사위원회 설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이들 중 9·11 때 남편을 잃은 4명의 여성들로 구성된 '저지 걸스'(Jersey Girls)는 그 중에서도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다.
유가족들의 활동은 9·11 국가위원회가 설립된 이후에도 멈추지 않았다. 청문회에 나온 콘돌리자 라이스(Condoleezza Rice) 당시 국가안보보좌관이 선서하지 않고 증언하겠다고 하자 유가족들은 저항의 의미로 모두 청문회장을 나가버렸고, 결국 라이스 보좌관은 증언 전에 선서를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유가족들은 9·11 국가위원회 초기 위원장으로 임명된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전 국무장관을 사퇴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선거 즈음 발표되기로 되어 있던 9·11 국가위원회의 최종 보고서가 2004년 선거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최종 결과 보고서 발표 일을 미루기 위해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또한 유가족들은 언론과 정부가 제대로 공개하지 않은 문서들을 자신들의 웹사이트에 올려 조사 과정에서 투명성이 보장될 수 있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