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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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딸은 내게 낯설고 신기한 경험을 두루 안겨주었다. 배내똥으로, 갓난아기 자식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애틋함을 느끼게 해 준 것도 그중 하나였다. 큰딸이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은 배내똥은 사랑스러웠다. 조그만 참새 똥만한 크기의 그것은 앙증맞아 보였다. 그것에서는 시큼하면서도 달큼한 향이 났다. 이른 봄 개나리 같은 그 샛노란 색깔은 어쩜 그리도 싱싱해 보였을까. 똥도 아름답고 예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강아지똥은 민들레 싹과 하나가 되어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을 피워냈다. 그것은 눈물겨운 사랑이나 희생의 다른 이름이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내가 건사한 똥들은 훗날 우리 식구의 밥이 돼주었다. 그 더러움으로 사람 살리는 일을 했으니 성인이 따로 없다. 외할머니와 큰딸의 똥은 어떤가. 그 똥들이 없었다면 나는 가족의 사랑이니 부모로서의 애틋함이니 하는 귀한 감정을 경험하지 못했으리라.
그토록 귀한 똥이 이제는 처치 곤란한 쓰레기가 돼버렸다. 언젠가 한 지인으로부터 요새 사람들이 누는 똥은 썩지도 않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럴 듯한 근거도 댔다. 가공식품에 첨가되는 각종 화학 첨가물들이 똥과 함께 배출되면서 똥의 분해 작용을 방해하기 때문이라는.
농담처럼 한 말이었으나 농담으로만 들리지 않았다. 똥은 원래 우리 생명을 살리는 존재였다. 그런 똥이 이제는 산업 폐기물 같은 취급을 받는다. 이런 세상에서 그 어떤 생명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똥과 같이 더러운 것에서 덕을 찾으려던 옛사람의 지혜가 새삼스럽게 다가오는 이유다.
저 엄행수가 똥을 지고 거름을 메어다가 그걸 업으로 사는 것이 지극히 깨끗지 못하다고 보겠지만 생활은 지극히 향기롭고, 몸을 굴리는 것이 지극히 더럽다고 보겠지만 의리를 지키는 점은 지극히 높은 것일세. ··· 이로 본다면 깨끗한 가운데도 깨끗지 못한 것이 있고 더러운 가운데도 더럽지 않은 것이 있단 말일세. ··· 대체 선비가 좀 궁하다고 해서 궁기를 떨어도 수치스러운 노릇이요, 출세한 다음 제 몸만 받들기에 급급해도 수치스러운 노릇일세. 아마 엄행수를 보기에 부끄럽지 않을 사람이 거의 드물 것일세.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엄행수를 선생으로 모시려고 하고 있단 말일세. 어떻게 감히 벗으로 사귀겠다고 할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엄행수를 감히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고 예덕 선생이라고 일컫는 말일세. - 연암 박지원의 <예덕 선생전> 중에서; '나는 껄껄 선생이라오'(보리) 70~71쪽에서 재인용함.똥 냄새 풀풀 나면서도 생활이 향기로운 '엄행수'를 우리 시대는 더 이상 용납하지 않는 것 같다. 깨끗해 보이지만 뒤를 캐보면 온갖 구린 냄새를 다 풍기는 이들이 세상 권세를 모조리 휘어잡은 채 떵떵거리며 살아가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들의 구린 과거를 너무나도 쉽게 잊어버린다. '더러움의 덕[예덕(穢德)]'을 찾으며 살아가려 했던 연암 선생이 우리를 보면 뭐라고 말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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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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