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역 광장에 붙어있는 생환 기원 메시지입니다.
서준영
"아들, 그러다가 만리(萬里)를 넘기겠다. 할 만큼 한 거 같으니까. 이제 엄마 생각도 좀 하지 그래?"저녁 시간에 맥주를 곁들이며 오고 가는 이야기 속에 엄마는 작심한 듯 진도 이야기를 꺼내셨다.
1만 리. 거리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못했었는데, 책 제목에나 나올 법한 어마어마한 거리를 향해 내가 가고 있는 것일까? 문득 궁금해 일지를 정리해 보았다.
2251km. 단위로 환산하니 5740리가 나왔다. 시간은 93시간이다. 이 짧지 않은 거리를 오고 가며 봉사라고 표현하기 민망하지만, 고등학교 이후 봉사해 본 기억이 없는 나의 봉사시간이 100시간을 향하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나오지 못하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다.
세월호 사고 이후 구조소식을 기다리며 TV를 켜놓고 잠들기를 수일 점점 장기화되는 것에 안타까워 어쩔 줄 몰랐던 나날들.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의 연속.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가를 두고 고민하다 더 늦기 전에 안산으로 가야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렇게 다녀온 안산. 그리고 다시 향하게 된 진도.
지금부터 써내려가는 내용들은 지난 4월 25일부터 5월 3일까지 자원봉사하며 안산과 진도를 오고 가며 겪은 이야기들이다.
사고 발생 두 달이 지났고, 어느새 개막한 월드컵은 언론매체 메인을 장식하고 있다. 잘 쓰지 못하는 글로 그날의 일들을 이렇게 전하면서 지금도 진도에는 바다만 바라보며 또다시 하루가 지나가는 것에 절망하는 실종자 가족을 생각해 본다. 또 임시 주택도 마다하고 차디찬 체육관 바닥과 팽목항 천막에 기거하고 계시는 실종자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아주셨으면 하는 마음이다.
4월 25일 금요일23일 임시 합동분향소를 찾아 조문을 마친 이후, 많은 생각과 고민들이 마음 속을 어지럽혔다.
'나는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고민하면 할수록 많은 생각들이 걸러지고 또 걸러져 하나의 생각만 남게 되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 된다. 뭐라도 해야겠다.' 생각이 정리되자 행동하는 것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일사천리였다. 여기저기 전화해 알아보다가 안산 자원봉사센터를 통해 임시분향소 쪽에서 일손이 필요하다는 내용을 전달받았다.
전화로 면접이 진행되었는데, 담당 선생님은 내가 가능한 시간과 사는 지역, 상황 등을 검토하더니 바로 업무를 배정해주셨다. 외가가 안산이어서 며칠 할머니도 뵙고 지내면서 다니면 어렵지 않을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렇게 안산으로 향하게 되었다.
집인 분당에서 안산으로 향하는 길. 금정역을 지난 이후부터 지상고가를 달리는 4호선 창 밖 풍경을 바라보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지' 믿기지 않는 사고 소식이 주는 슬픔과 약한 내 정신 상태로 과연 맡겨진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하는 우려가 복잡하게 뒤섞였다. 일을 해내는 것보다 실수해서 폐를 끼치면 어쩌나 싶은 마음에 걱정이 앞섰다.
임시분향소 앞은 금요일이어서 그런지 23일보다 더 많은 조문객이 보였다. 분향소 앞에 가득한 천막들 사이로 안산시 자원봉사센터 부스를 찾아 나와 통화했던 담당자 선생님을 찾았다. 선생님의 안내로 찾은 길가에는 대기하는 분들이 앉아서 쉴 수 있도록 의자가 놓여있고, 버스 시간표가 놓여 있었다. 이곳에서 안산시가 운행하는 진도행 버스에 오르는 분들을 위해 적십자가 준비한 물품을 실어드리고 안내하는 일을 배정 받았다.
휴가를 내서 2주 가까운 기간 동안 그 일을 해 오셨다는 아버지 뻘의 자원봉사자 선생님은 오전 7시부터 시작되어 밤 9시까지 이어지는 전 시간을 책임져 왔던 터라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면서도 휴가 기간만 일을 맡아보는 것에 미안해하셨다. 그런 선생님의 마음과 걱정이 전해져 오면서 실수 없이 잘 해내야겠다는 사명감이 되어 자리한다. 반드시 잘해야만 한다.
오전 7시부터 오후 9시 막차까지 10대의 버스가 안산시 올림픽 기념관 앞에서 출발하여 진도 실내체육관까지 운행되고 있었다. 매시간 버스가 출발하기 10분 전쯤 경황없이 진도로 내려가는 분들을 위해 적십자에서 준비한 물이며 빵 같은 간식거리를 버스 맨 앞좌석에 올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가면서 꼭 이용하라고 안내하고, 몇 분이 탔는지 집계해서 버스가 출발하면 시청 상황실에 전화하는 일을 했다. 업무 자체는 어려운 것이 없었다. 다만 6시 40분까지 올림픽 기념관 앞으로 갈 수 있을지, 심리적으로 강하지 못한 내가 이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지가 내심 걱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