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관료나 고위층의 집. 경기도 남양주시 남양주종합촬영소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설날에 고위층 집에 명함만 놓고 가도록 하는 사회적 규제는, <동국세시기>에 따르면, 주로 구실아치나 하급 군인들을 겨냥한 조치였다. 관리(官吏)란 말에서 官은 벼슬아치, 吏는 구실아치를 가리켰다. 벼슬아치는 과거시험이나 음서(특채)를 통해 관료가 된 공무원을 가리킨다. 구실아치는 벼슬아치를 보좌하는 공무원을 가리킨다. 서리나 아전이 구실아치의 대표적인 예다.
구실아치는 종9품보다도 아래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설날에 고위직 공무원을 방문한다면, 그 방문 목적은 아무래도 인사청탁이나 뇌물수수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구살아치들이 세배를 빙자해서 간부급 공무원을 방문하는 것을 관습상 금했던 것이다.
구실아치의 부정부패보다는 벼슬아치의 부정부패가 훨씬 더 심하지 않았을까? 구실아치들을 이렇게 새해 벽두부터 견제할 필요가 있었을까?
사극이나 소설에서 벼슬아치의 부정부패가 주로 강조되다 보니, 많은 한국인들은 벼슬아치의 비리 행위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탐관오리(貪官汚吏)는 벼슬아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냥 '탐관'이라 하지 않고 '오리'란 말을 덧붙인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부패 공무원은 벼슬아치인 관(官)뿐만 아니라 구실아치인 리(吏)에서도 많이 배출되었다. 액수로 따지면 벼슬아치의 부정부패가 더 심했겠지만, 전체적 규모로 따지면 구실아치 쪽이 훨씬 더 심했다.
벼슬아치들은 유교 철학을 배운 선비들인데다가 국가에서 보수를 받기 때문에, 웬만한 경우가 아니면 부정부패에 휘말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구실아치들은 달랐다. 구실아치 중에는 양인(자유인)도 있었지만 공노비(관노비)가 훨씬 더 많았다. 사극·소설에서는 노비들이 글도 제대로 못 읽었던 것처럼 묘사되지만, 실제로 관청에서 실무를 담당한 것은 주로 노비 출신의 구실아치들이었다.
국가가 구실아치를 선발할 때 양인보다는 공노비를 선호한 것은 공노비에게는 보수를 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공노비는 국가에 종속된 몸이기 때문에 국가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했다. 그래서 그들의 근무는 무보수였다.
공노비들은 한양에서는 2교대, 지방에서는 7교대로 근무했다. 이들은 근무 외의 시간을 활용해서 생계를 유지했다. 관청에서 근무하는 동안은 무보수였기 때문에 이들은 생계의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다 보니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부정부패를 범할 가능성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벼슬아치보다는 이들의 부정부패가 훨씬 더 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명 조식이 올린 상소문에 담긴 내용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