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광해>의 한 장면 21세기에도 왕은 살아있나?
Cj 엔터테인먼트
우리는 흔히 이런 말을 쓴다.
"손님은 왕이다." 진부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손님의 우월감을 높이려는 장사치의 교묘한 속셈과 손님을 잡아두고픈 애절함이 교차하는 명문이기에 21세기에도 당당히 살아 남아 있다. 조선왕조를 마지막으로 이 땅에서 왕이 사라진 지가 100년이 넘어가는데도 말이다.
20세기 조선의 마지막 왕을 끌어내린 것은 일본이었으나 21세기에 왕이 살아남은 까닭은 '왕 대접' 받고 싶은 소비자의 욕망과 그 욕망을 돈으로 바꾸고자 하는 사장님의 갈급함이 맞물린 결과이다. 그 욕망과 갈급함의 가운데에는 '생계'라는 볼모가 잡혀 있다.
아무리 '선한' 손님이라도... 이럴 땐 당황스럽다 인터넷에서 캠핑 용품을 판매하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는 대부분의 손님들은 '선하다'는 것이다. 판매자로서 손님을 선하다고 판단하는 것조차 손님을 왕으로 모시려는 이들에게는 불경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겠으나, 캠퍼들과 거래를 하고 있으면 '선하다'라는 말이 진심으로 우러난다.
내 개인적인 경험에 따른 것이긴 하지만, 돈·접대·모욕·무시·칼 같은 갑을 관계가 날을 세운 제약 영업 세계에서 만난 사람들에 비한다면 캠핑의 세계는 천국의 문에 가까운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천국의 문에 가까이 다가섰다고 해도 판매는 판매, 손님은 손님이다. 곤란한 경우는 많고 해결이 되지 않는 난제 앞에서는 그저 당황스럽기만 하다. 이를테면 이런 문제들이다.
사용하자마자 문제가 발생한 제품의 교환 혹은 환불. 텐트와 같은 캠핑 용품은 대부분의 제조사에서 초기 불량이라고 해도 야외에서 사용했다면 교환이나 환불을 해주지 않는다. 하지만 텐트는 써 보지 않고는 불량을 알아내지 못하는 문제가 허다하다.
저가의 제품은 A/S 비용이 판매가에 육박할 뿐더러 오가는 왕복 택배비가 판매가보다 더 비싸지는 경우가 있어 교환이나 일부 보상 처리를 주로 하게 된다. 이것을 A/S하자면 여러모로 비효율적일 뿐더러 솔직히 수리할 방법이 없는 게 대부분이다.
지연 도착에 따른 불만도 만만치 않다. 대부분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아침에 캠핑을 떠난다. 이 시간제한을 넘기면 주문한 물건은 쓸모가 없게 된다. 목요일에 주문해서 금요일에 받기를 기다리던 손님에게 "확실히 금요일까지 도착하느냐"고 묻는 전화가 자꾸 온다. 그런데 택배는 사정에 따라 하루 이틀 정도 늦기도 하는데 판매자로서는 택배회사를 컨트롤할 힘이 없다.
이런 경우 손님들이 '왕의 요구'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판매자인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들의 요구는 온당하기 때문이다.
'당신 과한 거 아냐' 조목조목 따지다간 돈이 사라진다하지만 그 요구가 온당한 것이라 하더라도 첫 마디부터 끝까지 비속어인데다가 내 직업 자체를 비하하거나, 업체 규모가 작아서 생기는 빈번한 일로 치부해버리면 그건 좀 속이 쓰린다. "그럼 그렇지", "형편 없구만.", "이럴 줄 알았어, 내가!"라는 말 등이 그렇다. 이런 전화를 하루에 두세 번 받다 보면 그날 저녁은 으레 소주 한 병, 맥주 한 병, 아주 매운 닭발 한 봉지를 사 들고 집으로 터벅터벅 걸어가게 된다.
그들이 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그들이 돈을 썼고, 나는 가정을 꾸려가기 위해 그 돈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온당한 요구는 요구라서 접수하겠지만 당신의 태도는 과한 게 아니냐'고 조목조목 따지다간 돈은 사라진다. 가슴이 떨려 그런 말은 입 밖으로 꺼낼 엄두를 내지 못한다.
유럽 어느 나라에서는 손님을 앞에 두고 일상사 이야기에 바빠 계산을 미루는 종업원의 사생활도 존중해준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상상할 수조차 없다. 그렇기에 고객의 온당한 요구 앞에서는 말을 더듬고 만다. 조금 더 이 직업에 적응해야겠다고 다짐한다. 널뛰듯 두근거리는 심장과 불안한 심리상태는 나약함에서 비롯되었으며 잘못 되었노라, 스스로를 타이른다.
사회 통념상 이런 상황에서는 판매자의 장사꾼 기질(그런 성격으로 장사하겠냐?)이 논란거리가 되지, 손님의 태도는 비판받지 않는다. '손님은 그럴 수 있다'가 정답이다. 돈은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허락하지 않는다. 돈을 쓰는 사람이 돈을 받는 사람의 감정까지 고려한다는 건 비상식이다. 손님이 판매자에게 공손하게 대하는 건 그 사람의 원래 성격이 공손하고 본성이 선하기 때문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게 좋다.
거래에는 물건만 오고가는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