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핸드폰 배경화면다소 '오글거리는' 글귀지만, 어둠 속에서 쓸쓸히 걸어오시던 어머니의 야윈 모습은 언제까지고 잊지 못할 것이다.
한경희
어둠 속에 걸어오시던 야윈 어머니, 사랑하기 위해 그 모습 기억할게요그리고 저녁이 되었다. 밖은 어둑했지만 어머니는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으셨다. 남편과 나는 동네를 한 바퀴 돌기 위해 집을 나섰다. 가을 저녁의 선선한 공기는 최적의 산책을 돕고 있었다.
어머니와의 대화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졌지만, 한번 결심한 일이니 지키기로 마음을 다잡아 보았다. 십몇 년을 함께 지냈으니 잠시 떨어져 있는 것도 괜찮을 거라는 자기위안도 다시금 마음을 잡는 데 도움을 주었다.
걷는 도중 남편에게 넌지시 질문을 건넸다.
"어떻게 생각해요? 나와 엄마의 결정에 대해."온전히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쪽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남편의 답을 기다렸다.
"나는 반대지만, 당신이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지 뭐."여전히 남편의 얼굴이 어둡다. 그럴 때마다 더욱 철없는 아내, 딸이 되는 것만 같아 괜스레 심술이 난다. 못나고 쪼잔한 인간의 전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나일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문이 닫힌 소방서의 어두운 앞길을 지나고 있는데 가녀린 실루엣이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어머니였다. 작은 키, 바짝 마른 몸은 힘없이 흔들거리고 있었고, 땅을 내려다보는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다.
사방이 어두운 가운데 쓰러질 듯 걸어오시는 그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혔다. 고민을 거듭하신 탓인지 더욱 깊어진 주름살이 보이는 듯했다. 눈물이 핑 도는 것을 참으며 어머니에게 다가갔다.
"어디 갔다 이제 오세요. 집에 가서 좀 쉬고 계세요. 한 바퀴 돌고 갈게요."그제야 우리를 발견하신 어머니의 힘없는 얼굴에 놀란 빛이 가득하다.
"그래. 다녀와라. 먼저 들어가 있으마."집으로 향하는 어머니의 어깨에 힘이 하나도 없다. 쓰러지실 듯한 그 모습에 연신 마음이 쓰라리다.
나는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사진에 글씨를 써넣을 수 있는 어플리케이션을 탐색했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쓰러질 듯 걸어오시던 슬픈 모습만 기억해'라는 글씨를 사진에 새기고 배경화면으로 등록했다. 그 충격적이며 슬픈 모습만 기억할 수 있다면 어떠한 상황이 오더라도 충분히 극복 가능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 나와 어머니는 다시 식탁에 마주 앉았다. 어머니는 할 말이 있다 얘기하는 나에게서 나올 말들에 미리 대비하시는 듯 비장한 모습이었다.
"이제 방 알아볼게. 걱정하지 마라.""아니에요. 엄마. 우리가 소소한 몇 가지의 약속만 지킬 수 있다면 함께 살 수 있을 거예요. 사실 어려운 것은 아니실 거라고 생각해요. 몇 개 되지도 않고, 그리 어려운 것도 아니니까요. 사실 결혼을 하게 되면 부모에게서 독립을 해야 하는데, 그것이 되지 않다 보니 나에게는 커다란 부담이었나 봐요. 같이 살더라도 그 점만 보장이 된다면 좋겠어요."어머니의 얼굴에 그제야 웃음이 번진다. 안도의 한숨이 언뜻 보인 것은 나의 착각만은 아니었으리라.
그런 다음 우리는 어머니의 수첩에 서로의 약속을 적었다. 번호를 매겨가며 적어 내려가는 동안 우리는 마치 소녀들처럼 웃기도 했다. 그 바람이 철저히 지켜지리라는 것에는 추호의 의심도 없었다.
아들의 휴가, 어머니는 또 다시 당신의 약속을 잊으셨다추석이 지나고 아들이 휴가를 나왔다. 2박 3일의 짧은 휴가지만 말년병장의 여유가 보인다. 아이를 위해 나는 밥상을 차렸다. 오랜만의 집밥이 녀석을 행복하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말이다.
그런데 어머니가 조용하시다. 다른 때 같으면 같이 밥상을 차리느라 분주하실 텐데 말이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나에게 온전히 일임하시기 위해 방에 들어가셨나 보다'라고 생각했다. 괜스레 기뻤다. 이런 적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한참 후 현관문이 열리며 어머니가 들어오셨다. 어디 다녀오신다는 말씀도 없으셨는데, 손에는 백화점에서 사 온 음식을 한보따리 들고 계셨다. 열어보니 족발 및 여러 음식들과 양념 등이 한 가득이다. 그것이 아니어도 이미 식탁에는 빼곡히 음식이 차려진 상태였는데 말이다.
덕분에 조미료가 적게 들어가 싱겁기 짝이 없는 소박한 집밥으로 아들을 기쁘게 해주려던 나의 계획은 또 다시 어그러지고 말았다. 결국 음식들은 엄청나게 많이 남게 되었고, 나의 머릿속은 그로 인해 또 다시 어지러워졌다. 어머니와의 약속수첩에는 분명 '밖의 음식은 되도록 들여오지 않는다'라는 것이 있었는데, 불과 하루 만에 뒤집어지다니. 이 노릇을 어쩐단 말인가.
밥상을 물리고 난 후 나는 아들에게 나의 핸드폰 배경화면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여태 있었던 일들에 대해 털어놓았다.
"어쩌면 좋으니. 너 제대할 때도 멀지 않았는데. 이런저런 일들로 할머니와 엄마가 말다툼 하는 모습을 제대 후에는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다시는 할머니께 잔소리 안 한다고 이렇게 다짐까지 했는데."눈물이란 참 신기하다. 한번 흘러나오기 시작하면 멈추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덕분에 아들 앞에서 눈물이나 흘리는 바보 같은 엄마가 되고 말았다.
"엄마. 예전에 엄마가 말씀하셨잖아요. 할머니 세대는 살아온 세월이 워낙 험했고, 그에 걸맞은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셨기 때문에 참으로 불행한 세대라고. 그분들이 변하기는 참 쉽지 않다고. 그러니 할머니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 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할머니가 하시는 일들이 결국은 우리를 위하는 것이니 말이에요."아들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몹시도 부끄러워졌다.
아들을 통해 본 나의 모습... 나도 할머니·어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다그날 밤이었다. 대학 동기들을 만나러 나갔던 아들이 밤늦게 돌아왔다. 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아들에게 말했다.
"업그레이드된 것 중에 '가상 홈버튼' 기능이 있더라. 네 홈버튼 잘 안 눌러지잖아. 그거 사용해 봐.""아니에요. 엄마. 잘 돼요. 바꿀 필요 없어요." 만류하는 아들의 손에서 핸드폰을 건네받고 나는 설정을 바꾸어주었다.
"괜찮은데…. 바꾸니 좀 불편한데…." 아들이 머리를 긁적거리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물끄러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내가 잘못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곧 깨닫게 되었다. 분명히 괜찮다고 하는 아들의 말이 있었음에도 나는 내 임의대로 아들의 핸드폰 설정을 바꿔버린 것이다. 아들의 뜻은 무시한 채 뜻을 관철시킨 나의 옹고집이 대체 앞집 할머니, 어머니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말인가!
나는 곧 방 안에 있는 아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미안하구나. 설정을 마음대로 바꿔서.' 아들에게서는 "아니에요. 이미 다시 바꿨어요. 하하"라는 답장이 왔다.
머리가 띵했고, 아들이 몹시 고마웠다. 아들은 나의 의도가 자신에게 해를 입히려는 것이 결코 아님을 알고 있었고, 그 때문에 번거롭고 성가신 일이라 해도 일단 받아들인 후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그것을 바로잡았던 것이다.
그렇다. 나도 앞집 할머니, 어머니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들이 결코 꺾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이제부터 발동되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만일 그것이 노화든 아니든, 내가 찾는 답은 이미 나온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인간이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마련이며, 그것이 세월이 지나며 완화되기는커녕 악화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 말이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노화는 이미 시작된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를 나는 자주 잊는다. 수많은 치매노인들을 바라보며 나에게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하는 오만함도 가끔 발견한다. 그러나 앞일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내가 내 눈앞 노인의 어눌함을 탓하는 사이, 내 뒤에 서 있던 젊은이들이 나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가정은 아마도 가정으로만 그치지 않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