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성장에서아내는 원래 시를 쓰는 '문학 소녀'였다. 결혼하고서도 서울시에서 개최하는 '주부 백일장'에 구청 대표로 선발되어 나가기도 했다. 그곳에서 아내는 장려상을 받았고 부상으로 받은 돈으로 나에게 처음 삐삐를 사주기도 했다. 1995년의 일이었다. 그런 문학 소녀가 민주 투사가 되었다.
고상만
한편,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갇혀 있던 감옥 안에서 나는 한 가지 결심을 한다. 인권운동가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 나는 불의한 권력의 잘못에 대해 항거했지만 결국 힘이 없어 내가 잡혀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처럼 누군가도 더 이상 억울하게 끌려가지 않는 그들의 벗으로 살고 싶었다. 감옥을 나온 후 기본적인 생활비도 받지 못하는 재야단체에서 일을 시작한 이유였다.
그 길을 가고 싶었던 나로서는 행복했지만 93년 결혼한 남편으로서 나는 경제적으로 무능했다. 더구나 따로 분가를 하지 못하고 시댁에 얹혀 살던 아내 장경희로서는 이중으로 힘든 길이었다. 특히 큰 아이가 태어난 후에도 나는 여전히 최루탄 냄새를 잔뜩 묻히고 집에 돌아오는 재야단체에서 일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런 아들이 내 부모 마음에 들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성격 괄괄한 아들에게는 차마 싫은 소리를 못하던 부모님은 대신 며느리에게 어떻게 좀 해 보라며 눈치를 줬다고 한다. 이 말도 세월이 한참 지나서야 듣게 되었다.
하지만 말을 하지 않았다고 나 역시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언제까지나 내 욕심만으로 살 수는 없었다. 결국 나는 아이 분유라도 살 수 있는 돈을 주는 직장을 다니지 않을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잡은 직장이 모 운수회사의 영업직 사원이었다. 일은 의외로 재미있었다. 우연히 벌어진 어떤 일을 잘 처리했다는 이유로 인정도 받았다. 그러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학생운동을 함께 하다가 1990년 죽어간 선배와 이에 격분하여 1991년 분신 자살을 기도했던 동지를 두고 나만 혼자 살겠다며 직장을 다니는 것이 마음의 번민으로 쉽게 지워지지 않았던 그때였다. 우연히 한 후배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몇 마디 말 속에 그 후배는 나에게 비수같은 말을 던지고 총총히 사라졌다.
"선배. 저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선배만큼은 죽을 때까지 운동만 하며 살 줄 알았어요. 실망이에요." 그 후배가 남긴 말이었다. 그날 나는 몹시 괴로워 했고 한편으로 분했다. 퇴근 후 혼자 포장마차를 찾아가 소주를 마시며 이제는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그 후배를 향해 욕을 하며 폭음을 했다.
"니까짓게 뭘 안다고 나에게 실망했다고 하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그렇게 소주를 미친 듯이 퍼마시던 그때였다. 환영처럼 내 눈 앞에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내가 대학에서 학우들 앞에서 외쳤던 수많은 약속의 말이었다.
"저는 결코 젊은 날의 한 때 치기로 운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젊어서는 양심을 외치고, 나이 먹어서는 표리부동한 삶을 살지 않을 것입니다.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아닌 것은 그렇지 않다며 당당하게 말하겠습니다. 그것이 제가 오늘 여러분에게 말하는 정의이며 양심입니다. 함께 합시다. 학우 여러분."부끄러웠다. 후배는 그때의 나를 기억했고 나는 그 약속을 잊었던 것이다. 만취한 상태로 나는 하염없이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던 아내 장경희를 끌어 안고 울며 말했다.
"미안한데 나 다시 인권단체에서 일하면 안 될까. 정말 미안한데 나 그냥 그렇게 살면 안 될까."아내는 나를 조용히 끌어 안아 주었다. 그렇게 엉망으로 취한 채 나는 더 많은 말을 주정처럼 말했던 것 같다. 그렇게 밤이 지났다. 다음날, 아내는 조용히 말을 했다.
"그래. 선배. 그렇게 하는 것이 행복하다면 선배 하고 싶은 대로 해. 사실 나도 선배가 매일 아침 '민들레처럼'(꽃다지 노래)노래 들으며 우울한 표정으로 하늘 바라보고 출근하는 것 보면서 마음 아팠어. 난 괜찮아."어쩌면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말할지 모른다. 참 '철없는' 남편과 '대책 없는' 여자라고 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인 94년 12월, 내가 다시 내 길을 걷도록 해준 내 아내 장경희의 일화였다.
장준하 선생 죽음의 진실, 아내가 있었기에 말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