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1월 19일자 엄마의 일기.
강정민
1월 19일 검찰청에 갔더니 면회 해제란다. (박종철) 살아서 나와라!!1월 24일 아버지와 같이 면회 입고 갔던 잠바 덧바지는 어디에 벗겨 숨겨두고, 홑청 작업복을 입고 손을 싹싹 비비며 오들오들 떨면서 면회를 한다. 누가 하늘 같은 이 자식들을 이렇게 하였을까?엄마의 다이어리에 박종철 열사 이름이 나오네. 왜 나오지? 87년 1월. 그렇다. 1987년 1월은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죽었던 때다. 그러면 오빠가 연행되어 보안대, 경찰서, 검찰청으로 끌려다니며 수사받던 때에 박종철 열사가 고문으로 죽었다는 말이다. 다이어리를 읽기 전까지 몰랐다. 오빠의 구속과 재판이 87년 6월 항쟁 시기와 엇비슷해서 난 민주화 된 후에 오빠가 구속된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순간 머리에 스친 생각은 '아, 오빠도 정말 위험했구나. 우리 오빠도 박종철 열사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구나'였다. 아, 엄마는 얼마나 무서운 날들을 보냈던 것일까?
당시 박종철 열사의 죽음에 대해서 정권은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를 했다. 참으로 자신만만하고 호기로운 정권이었다. 그뿐인가? 대통령 직선제를 말하는 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한다며 정권은 종주먹을 들이댔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상황임에도 정권은 뻔뻔스럽고 당당했다. 그 자신만만한 자들의 손아귀에 오빠가 있었다.
재판이 열리는 날, 조퇴하고서 재판에 참석하겠다고 엄마에게 말했다. 엄마가 학교에 전화 해주겠다 했지만 내가 말을 하겠다 했다. 그런 일까지 엄마가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난 담임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 오늘 오빠 재판이 있어서 조퇴했으면 하는데요.""오빠 재판?" "네 학생운동 때문에요.""그런 이유 때문이라면 조퇴는 안돼. 부모님이 어떤 생각으로 너의 재판 참석을 허락하셨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잘못 생각하신 거야. 난 널 위해서 조퇴를 허락할 수가 없다.""오늘 오빠를 못 보면 언제 볼지 몰라요. 저는 주민등록증이 없어서 면회가 안 된단 말이에요."결국, 난 조퇴를 못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른 핑계를 대고 조퇴증을 끊어달라고 할걸.' 난 책상에 엎드려 펑펑 울었다. 몇 년간 오빠 얼굴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러웠다.
아버지가 통곡을 하셨단다, 통곡을 얼마 전, 엄마가 오빠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는 재판정에서 변호사가 했던 말을 지금도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어.""뭐라 했는데.""피고인의 아버지는 직장생활로, 피고인의 어머니는 살림과 가게 일에 바빠서 피고인을 제대로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판사님 선처해....."엄마는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우신다. 변호사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부모님은 먹고살기 바빠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자식에게 똑바로 가르치지 못한 부모가 되었다. 자식의 형을 줄이기 위해선 어떤 모욕도 참아야 했다. 변호사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았지만, 모욕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고 엄마의 마음엔 상처로 남아 있다. 재판일에 대한 엄마의 기록은 이렇다.
3월 19일 비. 오늘은 재판날. 아버지는 6가에서, 나는 집에서 가기로 하였다. 비가 내린다. 우리의 슬픈 마음을 (하늘도) 같이 하나보다. 법정에서 아버지를 만났다. 차마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왜 우리가 여기서 만나야 하나 그들에 의해서. 드디어 들어왔다. 양팔이 잡힌 채 들어온다. 얼마나 힘겨운 일이냐? 7시경 아버지가 귀가하셨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충혈이 되었다. 옷을 벗지도 않고 아버지는 통곡한다. 마흔 넘게 살아오면서도 나는 아버지가 우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속마음을 보이지 않는 분인데 그런 아버지가 통곡하셨단다. 통곡을. 엄마의 다이어리를 읽다 보면 오빠는 구치소에서도 금치를 당하고 보안계장에게 구타를 당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과와 재발방지를 요구하며 열흘 동안 단식을 했다. 단식하는 자식들을 따라서 구속자 어머니들도 농성했다. 몸도 성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빠가 단식을 열흘이나 했다니. 몸이 성해도 힘든 단식을 그것도 교도소에서.
몇 차례의 재판을 받고 오빠는 다행히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그리고 민주화가 되고 나서 오빠는 사면복권이 된다. 출소한 뒤 오빠는 무릎이 시리다는 말을 자주 했다. 고문의 후유증일 것이다. 상처는 몸뿐 아니라 마음에도 남는다. 가족들도 많은 상처를 받았다. 사실 오빠보다 더 큰 고통을 받은 사람들도 부지기수로 많다. 5공화국 때 죽은 사람들만 해도 얼마나 많은가? 그 수많은 고통이 지금은 다 치유가 되었는지, 아물었는지 묻고 싶다. 죄지은 자는 죗값을 치르고 처벌을 받은 것일까?
스무 장이 넘는 영수증... 엄마의 피눈물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