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직접 쓰신 글씨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계신다.
우중혁
먼저 최상위 포식자에 속하는 할머니와 대화를 나눠 보았다. 할머니 이예순(76) 여사는 50여 년 전에 할아버지와 결혼한 이후 많은 고생을 하셨다. 할머니의 표현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성격이 매우 포악하셨다고 한다. 직장도 여러 번 때려치우고, 술도 많이 마시고, 그냥 마음가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나는 그런 거칠고 자유분방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의 이 말은 전혀 실감나질 않는다.
"젊었을 적에 니 할아버지는 마음에 안 드는 상황이 발생하면 불같이 화를 내셨단다. 밥상 엎어지는 일도 하루 이틀 일이 아니었지." 하루는 할머니가 참다못한 나머지 가출을 하셨는데 할아버지에게 시달릴 아빠, 고모, 삼촌을 생각하니 너무도 가슴이 아파 모두 잠든 밤중에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고 하셨다. 이 말씀을 하실 때 할머니 눈에 살짝 눈물이 비치는 듯도 했다. 이렇게 밥상 뒤엎는 일은 아빠와 엄마가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또다시 있었다고 한다. 성인이 된 아빠는 더 이상 참지 못한 채 할아버지에게 대들었고, 그 이후론 내가 태어난 뒤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었다는 게 할머니의 얘기다.
"지금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 저렇게 찍소리 안하고 살잖니? 니 할아버지 (성질) 많이 죽은 거다."
할머니는 평생 할아버지로 인한 마음고생에, 집안일로 인한 몸 고생까지 겪을 수 있는 생고생을 다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자신의 손으로 집안일을 다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몇 십년을 살아오셨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곳간 열쇠' 싸움우리 엄마. 김종남 여사(48)는 집안일을 즐거이 담당한 할머니 덕분에 결혼한 이후에도 사회생활을 열심히 하셨다. 그런데 어느 날 엄마가 집안일의 영역에 나타났다. 할머니는 처음에 직장을 그만두고 서울에서 돌아온 며느리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다. 엄마는 원래 한 시민단체의 '우두머리'로서 약 20여 년간 활동을 해 오셨는데, 임기가 끝나서 집으로 돌아온 거다. 할머니는 자주 "에미가 내 일을 야금야금 좀먹는 것 같다"라고 하셨다.
실제로 엄마는 할머니가 하시던 밥짓기, 설거지, 청소, 빨래 등을 모두 자신의 일로 만들었다. 아마 하기 싫어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을 거다. 어쨌든 할머니는 마치 자신의 직장을 잃은 듯 보였다.
예전 조선시대에 며느리들은 시어머니에게 곳간 열쇠를 물려받을 날만을 학수고대하며 모진 시집살이를 잘 버텨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집안의 부와 위세를 상징했던 곳이 곳간이고, 그 곳간 열쇠는 시어머니들에게 자존심이었다.
마치 곳간 열쇠를 빼앗긴 듯 집안일을 빼앗긴 할머니는 서예와 원예 등으로 시간을 보내신다. 할머니는 가끔가다 엄마가 없을 때 집안일을 했지만 그것으로 만족할 수는 없으신 듯 하다. 결국 바깥으로 눈을 돌리시게 된 할머니는 요즘 노래교실도 다니고, 에어로빅도 하고, 밭일도 하며 여가를 보내고 계신다.
쫓겨난 것 같지 않느냐는 질문에 할머니는 "가족에게 그런 게 어딨냐"며 웃으셨다. 지금 할머니는 집안일을 빼앗은(?) 엄마를 더 이상 미워하지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서서히 여가 즐기는 법을 배우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하더라도 할머니는 여전히 엄마에게 여러 가지 일을 시키며 '최상위 포식자'의 권위와 자존심을 잃지 않는다. 곳간 열쇠를 완전히 물려주지 않았다고 여기시는 것 같다.
실제로 곳간 열쇠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집안 청소와 밥상 위에서 나타난다. 엄마는 청소를 하루에 한 번은 꼭 해야 한다고 여긴다. 하지만 할머니는 이틀에 한 번을 해도 별로 상관없다고 여기시며 오히려 매일 청소기를 돌리는 엄마에게 핀잔을 주곤 한다. 또한 할머니는 시간이 날 때마다 반찬을 만드는데, 그 반찬을 식탁 위에 꼭 올려놓으신다. 엄마의 반찬과 할머니의 반찬이 밥상 위에서 투쟁하는 형국이다.
물론 엄마는 궁극적으로 할머니의 명령을 따른다. 지금 할머니는 은밀하게 혹은 비공식적으로 우리 가족을 부려먹는 즐거움을 찾으셨고, 엄마의 집안일은 갈수록 늘었다. 그런 할머니는 우리 가족에서 절대적인 존재이다.
어머니 "우리 가족 식사 분위기 때문에 가끔 체할 때가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