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여성의 자아 찾기를 그린 영화 <써니>
CJ 엔터테인먼트
그가 어떤 사람인지 한 단어로 알고 싶었지만 늘 실패했던 나는 그에게 직접 물어보기로 했다. 강력하게 아니 간절하게 아니 처절하게 그를 알고 싶다. 그게 허망할지라도. 이 인터뷰는 예전 우리의 대화 속에서 그도 나도 인터뷰인지 몰랐던 것들을 나의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것들과 인터뷰를 위해 실제로 묻고 답했던 이야기들로 채워졌다.
그는 찢어지게 만큼은 아니지만 언제든 찢어질 수 있을 만큼 가난한 집에서 자라났다. 대한민국의 너무나 가난한 보통 아버지처럼 술 마시고 노름하던, 가끔은 아내에게 손찌검도 하시던 아버지와 <엄마를 부탁해>의 엄마 같은 어머니. 그리고 형 하나, 누나 하나, 남동생 하나다.
그는 가능한 많은 학생을 입시에 합격시켜야 한다는 고3 담임의 목표와 자기 뜻과의 괴리 속에 시험 보러 가던 날까지 자신이 무슨 과에 지원했는지 알지도 못했다. 그렇게 본 대학 시험에 덜컥 붙어버리자 아버지는 거하게 한턱내시고 밤새 뿌듯해 했다. 이후 학과 교수님들 눈치를 받으며 얻은 교직 이수 덕에 고교 시절 하고 싶었던 영어 교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교사가 되었다.
그리고는 8년간 데이트 비용을 대고 강원도 인제까지 수없는 면회를 왔던, 그를 자기 부모보다 좋아했던, 그를 너무나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을 했다.
그의 별명은 대학 때 스스로 붙인 '천진난만 순진무구'였고 남들이 현재 부르는 것은 '샤프', '잔머리의 대가'이다. 오후 10~11시에 퇴근하면서 시민기자로 활동도 좀 하고 사진도 좀 찍고 보드도 좀 탄다. 뭔가 부당하다 느끼면 어제까지 농담하던 사람에게 대꾸도 안 한다. 그가 상사일지라도. 아쉬울 것이 없는 사람처럼. 내 머릿속 과거에서 가져온 인터뷰로 시작하자.
"당신은 무슨 색깔을 좋아해?""생각 안 해 봤는데?""말이 되나? 40 평생 사는 동안 좋아하는 색깔을 정하지 못했다니 그런 사람 처음 보는데? 초록색은 어때?""초록색? 음 생각해보니 초록색을 좋아하는 것 같아. 하지만 내가 초록색이 좋다고 하면 나는 초록색이라는 색깔에만 갇히게 되잖아. 하지만 다른 색을 생각해보면… 그래 검정색은 싫어하는 것 같아. 좋아하는 색은, 하얀색도 초록색의 느낌처럼 좋아. 왜 한 가지 색만 좋아한다고 말해야 하지? 나는 많은 색깔이 좋아." 이 사람은 색깔에 대해 생각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내 질문이 '모든 상식에 도전하라'는 정신에 정말 딱 맞는 '도전 받아야 할 질문'이었을까? 너무 당연한 것이 당연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또 다른 질문.
"당신은 어렸을 적 꿈이 뭐야?"(이 질문을 들으면 나는 아프다. 어른이 되어 버린 내가 이루어 놓은 것이 없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래서 아이가 이 질문을 했을 때 가장 대답하기 힘들었고 생각 없이 살아온 나를 들키기 싫었고 포장하고 싶어서 아이들에게 둘러댔었다)"그런 거 없었는데?"(아주 당당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당당하게 말해?""진짜로 없었는데."생각해보니 초등학교 때 가장 짜증나는 질문이 '너 커서 뭐가 되고 싶냐'는 거였다. 아니 내가 아는 직업도 없는데 뭐가 되고 싶냐니? 엄마가 만날 '변호사 되라'는 말에 '변호사'라고 대답하거나, 드라마에서 스튜어디스나 비서도 멋진 것 같다는 생각에 '비서'라고 했더니 수의사 삼촌이 '남의 심부름이나 하는 비서를 뭐 하러 하냐'는 핀잔을 준 후 '비서가 좋은 것이 아닌가 보다'라는 생각을 했다. 사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 외에는 꿈이나 직업에 별 관심이 없었다. 크면서 사람들은 꿈을 가지라고 강요했다. 꿈이 없는 나는 바보 같았다. 그래서 어른인 나는 지금 요 모양 요 꼴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는 꿈을 강요하는 세상에 "나는 꿈이 없었는데? 그게 뭐"라며 오히려 나를 이상한 질문을 하고 앉아 있는 사람으로 만들었다. 그는 세상의 통념을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나에겐 선물을 받는 것이 당연한 크리스마스도 자신의 생일도 그는 선물 받을 의미를 찾지 못했다며 패스. 아이들 요구에는 어쩔 수 없는 아빠였지만.
그는 연애할 때도 '밀당'을 하지 않았다. '척'이라도 하라는 친구의 충고에 "난 그런 거 안해"라며 솔직하게만 나를 대했다. 그리고 솔직하게, 이유를 둘러대지도 않고 정말 솔직하게, 내가 싫어졌다며 각자의 길을 가자고 요구했다. 변해버린 나를 남편은 참기가 어려웠나보다.
남편의 고백 "당신에게서 내 모습을 봤어" 내가 변하면서 남편을 불쾌하게 했던 대화들을 떠올려 봤다. 변하기 전의 나는 한 마디로 견해가 없는 바보 같았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야단을 쳐야할까, 놔둬야 할까? 여행 전 쇼핑을 할 때도 가까운 마트 가서 튜브를 사야하나, 백화점으로 가서 상품권을 써야 하나? 남편에게 묻는 것이 편했고 정치적 사안이건 물건 구매건 남편 뜻이 대부분 옳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남편에게 많은 부분을 의지했던 나는 언제부터인가 사사건건 "내가 맞다"는 주장을 폈다. 베란다 천정에 붙어 있는 빨래걸이에서 끊어진 매듭 묶는 방식도 "매듭이 한 개 있어야 튼튼하다"고 주장하는 남편에게 "한 개건 두 개건 이미 묶어놓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냐"고 말했다. 유난히 집을 안 치우는 나는 "허리 아파서 20분도 서있기 힘든 내가 2~3시간씩 어떻게 집을 치우냐"며 "난 노력하고 있고 이것 이상 못한다"고 강하게 말했다. "할부로 책을 사나 만든 목돈으로 책을 사나 내가 알아서 샀는데 뭐 어떠냐"고 화내며 아주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다.
지지고 볶고 투쟁하며 살아온 다른 사람들의 10년을, 싸움 모르던 우리가 이렇게 1년으로, 일시불로 치르고 있었다. 나는 나름 확신이 있었고 선택에 책임질 용의가 충분히 있었으며 내 결정들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사람이 된 내가 바보 같지 않게 느껴졌다.
이런 소소한 문제들을 부딪치며 보낸 1년여 끝에 교육문제도 부딪치기 시작했다. 시험 전날 문제집 한 장 들춰보지 않은 아들에 대해 나는 "공부하겠다는 애만 시킬 거라서 공부하기 싫다는 둘째는 시험공부 안 시켰다"고 서슴없이 이야기 했고 남편은, 놀라 자빠졌다(나도 나름 생각이 있었는데…).
아이들까지 내가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남편은 각자의 길을 가자고 했다. "오늘 이 문제 때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고민했다"며. 나 역시 남편이 독재자 같았고 나의 많은 결정들을 타박하면서 나를 못 믿고 나를 지지해 주지 않는 사람이라고 느껴졌다.
결국 아픈 어머니 문제나 직장 문제 등을 고려하여 겨울에 도장을 찍기로 결정하고 한 달을 보냈다. 그는 어제와 똑같이 출근하고 퇴근했고, 나는 밥하고 빨래하고 옷을 다리고 어머니 밥을 드렸다. 꼭 필요한 대화만 하다가 그는 소파에서, 나는 식탁에서 각자의 술을 따랐다. 그렇게 같은 집에서 살며 한 달이 지났다. 우리는 그럭저럭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카톡 메시지가 왔다.
"자기야 나두 사랑하는데. 머리가 복잡할 따름인 거야. 당신 생각 많이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