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모를 쓴 신라왕의 모습(상상화). 서울시 용산구 용산동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신라 진평왕 때인 서기 631년에 발생한 '칠숙·석품 사건'도 조작의 냄새를 풍기는 이상한 사건이다. 진평왕은 579년부터 632년까지 53년간 왕위를 지켰다. 이 53년간 중에서 603년 이후의 27년간은 상대적으로 왕권이 불안정했다. 고구려·백제의 잦은 침공으로 신라 정세가 불안했다. 사건이 발생한 631년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서 사건 이듬해인 632년에 선덕여왕이 등극했다. 여왕은 김춘추 가문과 김유신 가문으로 대표되는 신세력의 지지를 배경으로 했다. 따라서 그의 등극은 당시로서는 꽤 혁신적인 사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여왕의 등극 이전에 모종의 정치투쟁이 있었으리라는 점은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발생한 것이 바로 칠숙·석품 사건이다. 이것은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신세력이 집권하기 직전에 발생한 대형 역모 사건이었다. 따라서 이 사건이 신세력의 권력 장악에 상당히 기여했으리라는 점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사건인데도 <삼국사기> '신라본기' 진평왕 편에 기록된 이 사건은 외형상 너무나도 엉성하기 짝이 없다.
"여름 5월(음력), 이찬 칠숙이 아찬 석품과 함께 반역을 모의했다. 왕이 이것을 (미리) 알아내서 칠숙을 잡아 동시(동쪽 시장)에서 참수하고 9족을 함께 평정했다. 아찬 석품은 백제와의 국경까지 도망갔다가 처자식이 그리워져서, 낮에는 숨고 밤에는 이동하며 총산으로 되돌아왔다. 나무꾼 하나를 만나 나무꾼의 헌옷과 (자기 옷을) 바꿔 입은 뒤 땔감을 지고 자기 집에 숨어들었다가 붙잡혀 사형을 당했다."
이 기록에서는 사건의 과정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사건의 처벌 과정만 상세할 뿐, 역모의 경과과정은 전혀 알 길이 없다. "이찬 칠숙이 아찬 석품과 함께 반역을 모의했다"는 문장이 사건의 실체에 관한 전부다. 반역을 한 것도 아니고 반역을 모의하다가 붙들렸다는 것이 사건 자체에 관한 기록의 전부다.
김춘추·김유신 가문이 구세력을 약화시키고 권력 정상에 한걸음 더 다가간 계기가 된 사건치고는 사건의 실체에 관한 기록이 너무나 소략하고 간단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에 비해 관련자들에 대한 처벌은 너무나도 엄청났다는 놀라움을 감출 수 없다.
반역행위의 실행에 착수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예비·음모 수준에서 발각된 것인데도, 칠숙·석품 본인들은 물론이고 칠숙의 9족까지 멸족을 당했다. 역모 사건에서 주범의 9족까지 처형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한 대형 사건인데도, 사건의 실체에 관한 기록은 "이찬 칠숙이 아찬 석품과 함께 반역을 모의했다"는 부분뿐이다.
한편, 사건이 터진 이후에 석품이 보인 행동은 역모사건의 주범이 보인 행동이라기에는 어딘가 어색하기만 하다. 그는 국경까지 도주했다가 갑자기 가족이 그리워서 나무꾼과 옷을 바꿔 입고 집에 들어갔다가 붙들렸다. 이것은 석품 자신에게도 역모 사건이 뜻밖의 사건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처럼 이 사건의 경우에는, 역모 사건을 처리한 쪽이 사건을 통해 얻은 것은 매우 많은데 반해 기록 자체가 너무 소략할 뿐만 아니라 주범들의 행동도 어설프기 그지없다. 9족을 멸할 정도의 중범죄였다는 메시지만 강조됐을 뿐,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이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칠숙·석품 사건으로부터 15년 뒤에 발생한 비담 반란사건의 경우에는 당사자들의 대화 내용까지 상세히 남아 있다. 그런데 칠숙·석품 사건은 비담 사건 못지않게 중요한 사건인데도 사건의 실체에 관한 기록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100% 확정을 할 수는 없지만, 김춘추·김유신 가문이 권력 강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조작 사건이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