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통일의 주역인 비스마르크.
위키피디아 공용자료실
많은 사람들은 19세기 비스마르크의 독일통일에 대해 잘못된 선입견을 갖고 있다. 1871년 독일통일을 무력에 의한 통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독일통일을 이룬 견인차는 '독일판 개성공단'이었다.
독일통일을 무력 통일로 오해하게 되는 첫 번째 이유는, 통일의 주역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1815~1898년)의 별명이 철혈재상이라는 점에 있다. 비스마르크는 통일 9년 전인 1862년 독일연방의 일원인 프로이센왕국의 총리가 된 직후에 가진 의회 연설에서 "시대의 중요한 문제들은.... 연설이나 다수결에 의한 것이 아닌 철(鐵)과 혈(血)로써만 결정될 것"이라고 말했다.
'철' 즉 강철 무기와 '혈' 즉 전쟁으로 시대의 주요 문제 즉 통일문제를 해결하자고 했다는 발언을 근거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비스마르크를 철혈재상이라고 부르고, 독일통일도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총리 취임 당시까지만 해도 비스마르크가 말을 함부로 하는 정치인이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이전의 외교관 생활 때도 그랬다. 그는 일단 입으로 내뱉고 보는 스타일이었다. 이 점은 그에 대한 당시의 일반적인 평가에서도 잘 드러난다.
민족 외부에 대해서만 사용된 '철혈정책'962년 이래 독일 땅에는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계승한 신성로마제국이 존재했고, 그 아래에 수많은 제후국이 존재했다.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에 의해 1806년 해체됐고,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 독일 땅에는 독일연방이 등장했다. 독일연방은 35개의 제후국과 4개의 자유도시로 구성된, 매우 느슨한 연합체였다. 연방정부 없이 연방의회만으로 구성됐으니, 통일의 전(前) 단계라 할 수 있겠다.
이 독일연방의 소속 국가 중 하나가 바덴 대공국이었다. 공(公) 급의 제후가 다스리는 국가라 하여 그렇게 불렸다. 이 바덴 대공국의 정치인 중 하나가 로겐바흐(1825~1907년)라는 자유주의자였다.
로겐바흐는 비스마르크가 총리가 되기 2년 전인 1860년 프로이센의 역사학자이자 정치인인 막시밀리언 볼프강 둥커에게 보낸 편지에서 "(외교관 비스마르크는) 무례함으로 정치 경력을 쌓으려는 원칙 없는 융커(지주)"라고 비판했다. 아무 말이나 툭툭 던지는 비스마르크의 습관을 비판하는 편지였다.
로겐바흐의 편지에서도 드러나듯이, 총리 취임 당시까지만 해도 비스마르크는 생각 없이 말을 내뱉는 스타일이었다. 따라서 총리 취임 당시의 철혈정책 발언만으로 그의 독일 통일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의 통일 과정에서 철혈정책이 전혀 동원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전체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20세기 독일 재통일의 주역인 헬무트 콜이 총리에 취임할 때 그랬던 것처럼, 비스마르크가 취임할 때도 프로이센이나 독일연방 내부의 대체적인 반응은 '얼마 못 갈 거야'였다. 말을 함부로 하는 정치인이 총리 자리에서 오래 버티기는 힘들 것이라고 봤던 것이다. 그가 그로부터 30년간이나 그 자리를 지킬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