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샤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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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에 초대 중화민국 총리를 지낸 인물이 있다. 탕샤오이(한국 발음은 당소의)라는 외교관 출신의 청나라 정치인이다. 조선에 대한 열강의 경쟁이 가장 극심했던 1880년대 중반부터 1890년대 후반까지 조선에서 외교관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조선 근무 시절의 상관인 위안스카이(한국 발음은 원세개)는 중화민국 초대 대총통에 이어 황제에 오르고 탕샤오이 본인은 중화민국 총리에 오른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188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조선에 근무한 청나라 외교관들은 여타 외교관들에 비해 역량과 관운이 좋은 사람들이었다.
바로 그 탕샤오이가 이명박 정부의 전작권 환수 연기와 박근혜 정부의 환수 연기 움직임을 봤다면, 아마 "한심하다!"며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래에서 소개할 역사적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청일전쟁 직후 관계회복에 나선 조선-청나라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는 신하국과 황제국의 관계였다. 그런데 1894년에 일본이 조선 정부를 장악하고 청나라를 상대로 청일전쟁을 도발하는 과정에서 양국의 국교는 단절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난 뒤에 양국은 어떤 형태로든 관계를 재개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조선 입장에서는, 국교 단절로 인해 북방 주민들의 주식인 만주산 콩을 확보하기 힘들었다. 또 청일전쟁 와중에 일본 시장을 상실한 인삼업자들을 위해 청나라 시장을 뚫어줘야 했기 때문에 조선 입장에서는 국교 회복이 시급했다. 청나라 입장에서는, 조선에서 활동하는 화교 상인들을 보호하고 조선에 빌려준 차관을 받아내자면 조선과의 관계부터 회복해야 했다.
관계 재개의 필요성을 인식했다는 점에서는 조선과 청나라가 똑같았지만,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재개할 것이냐 하는 점에서는 양국이 의견을 달리했다. 조선은 '기존의 황제국-신하국 관계가 파기되었으니 상호 대등하고 평등하게 수교하자'는 입장을 세웠다.
청나라의 입장은 좀 미묘했다. 전쟁에 패해 조선에서 쫓겨난 마당에 황제국-신하국 관계를 복원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상호 평등한 관계를 맺자니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청나라는 정치관계가 아닌 상무관계를 맺는 수준에서 관계를 회복하고자 했다. 청나라가 희망한 관계는 2002년 한중수교 이후 한국과 대만이 맺고 있는 관계와 유사했다.
청일전쟁 이전부터 조선에서 근무했던 탕샤오이는 전쟁이 끝난 뒤 임지에 복귀했다. 청일전쟁 직전에 신변의 위협을 느낀 위안스카이가 '근무지를 사수하라'는 상부의 명령을 무시하고 조선을 탈출한 뒤부터 탕샤오이는 조선 문제에 관한 실무 책임자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의 임무는 '조선과의 관계를 재개하되, 그 관계를 어떻게든 상무관계에 묶어두는 것'이었다.
조선과 수교할 수 없는 이유관계 회복을 위한 움직임이 진행되던 상태에서 1896년 6월 17일 탕샤오이와 조선 통역관 박태영의 회동이 이루어졌다. 전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오늘날의 외교통상부) 참의인 변원규가 고종의 명령을 받은 뒤 박태영을 탕샤오이에게 파견함으로써 성사된 만남이었다.
이때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 있었다. 전년도에 벌어진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를 잃은 고종은 일본의 간섭을 피할 목적으로 러시아공사관에 피신해 있었다. 그래서 탕샤오이를 따로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변원규를 통해 박태영을 탕샤오이에게 파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