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세 여자엄마와 아내, 그리고 딸, 아버지 떠나신 후 시골 산 아래 집에서 모시며 살던 시절 세 사람은 이렇게 운동복 바지 입고, 커피포트에 음료수 넣고 산으로 도라지 더덕, 둥굴레 고사리 캐러 다녔다. 다시는 한 장의 사진 안에 함께 찍을 수 없게 된 그 시절.
김재식
그런 엄마를 조금이라도 마음 편히 지내게 하고, 병도 회복이 되기를 바라며 한때는 충주에서 한 집에 살며 나물 캐고 채소 키우며 한솥밥을 먹으며 살았었다. 나에게 주어진 역할은 시골집에서 엄마의 당뇨와 결핵을 치료하며 모시는 것이었다. 여러 며느리 중 가장 편하다고 하시던 며느리인 아내와 늘 특별한 애정을 더 주시던 둘째 아들인 나와 살겠다고. 그러나 병은 집에서는 감당 못할 만큼 악화되어 울산시립병원에 보내드려야만 했다.
불과 몇 년 안 계셨지만 엄마가 계시던 자리는 이후 나를 참 슬프게 하는 빈 자리가 되었다. 일을 다녀오면 대문 앞 텃밭에서 모자를 쓰고 일하다가 나를 반겨주시던 자리도 비었고, 맛있는 과일이나 음료수를 놓고 웃으며 티비를 보던 자리도 비어 침묵만 남았다. 같이 차를 타고 구경을 가던 박달재와 다슬기를 잡던 큰 냇가에도 더 이상 엄마는 없었고, 같이 있던 조카 아이들을 말로 혼내시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몇 년 안 지나 이번에는 아내의 난치병으로 나는 또 병원에서 24시간 간병에 붙들리면서부터는 엄마는 전화로밖에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병원 복도에서, 치료실에서 전화로 간간히 하는 말은 '미안해 엄마, 좀만 더 버티고 기다려줘' 그게 전부였다.
그날 아침, 군무원으로 멀리 강원도에서 근무하는 동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아무래도 어머니가 안 좋아지셔서 울산으로 내려가 봐야 할 것 같아, 못 갈 거라고 생각은 하는데 혹시나 싶어 연락했어, 갈 수 있으면 들러서 가려고, 가기 힘들지?""아무래도, 바로 사람 구하고, 집사람을 맡기고 내려가긴 너무 복잡하고 중증이라….""그럼 가서 연락할게."그렇게 전화는 끊고 종일 불에 데인 사람처럼, 심한 위궤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동동 구르고 안절부절 하며 보내던 중 오후 3시에 마침내 소식이 온 것이다. 갑자기 몰려오는 숱한 미안함들, 비닐하우스에서 땀을 쏟으며 일해주고 모은 돈을 고무줄로 묶어서 형제들 아무도 모르게 내 손에 쥐어주던 엄마의 무기한 무이자 대출. 난 그걸 같이 살 때 오래 사시라고 한 달에 만 원씩 갚아드렸다. 일부러 월급날이면 손에다 꼭꼭 쥐어드렸다. 이달치 빚 상환이라며, 나중에 병원에 가실 때 잔금을 일시불로 드려야 했는데 그렇게 못했다. 영원한 빚이 되고 말았다.
마음은 미어지는데 눈물은 한 방울도 안 나오고. 어쩌면 운다는 것조차 할 자격이 없는 아들이다 싶었다. 무슨 아들이 엄마가 그 마지막 몇 년을 병상에서 힘들게 보내는데 명절에도, 생일에도 얼굴 한 번 안 보여주었다는 말인가. 임종 연락이 와도 가보지도 못하는 그게 무슨 아들이라고.
전화 몇 통으로 형제들에게 대신 "미안하다, 미안하다" 엄마에게 못한 말 대신하고 병원 근처 공원으로 숨어들어갔다. 위로하겠다고 밤 열두 시에 친구 둘이 찾아왔다. 고맙게도, 그 친구들과 새벽 두 시가 되도록 산길을 걷다가 공원 벤치에 앉아 하늘보며 커피만 마시고.그렇게 고마운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다시 또 밤 길거리로 나가서 텅 빈 도시의 아스팔트를 마냥 걸었다.
"엄마, 내가 얼마나 미안하고, 빨리 엄마에게 가봐야지 하며 마음 졸이고 살았는지 알지? 나 울면 감당 못해서 안 울래." 국가유공자인 아버지를 따라 대전 국립현충원에 모시는 3일째 안장 시간, 아내를 고등학교 동창 친구에게 잠시 맡기고 일산에서 현충원으로 달려갔다. 겨우 영정 사진 보고 무릎 꿇고 기도 한번 올리고 서둘러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야 했지만.
"엄마, 같이 기억하는 어려웠던 시절, 난 모르는 엄마 혼자의 기억들 다 잊고 편히 쉬세요!" 며칠이 지나도 몽롱한 침묵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이러다간 눈물도 없는 3년상 치르겠다 속으로 염려하며 엄마에게 편지하나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