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편집국 폐쇄에 출동한 경찰장재구 <한국일보> 회장이 용역 업체를 동원해 편집국을 폐쇄하는 언론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사흘째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17일 오전 서울 중구 한진빌딩 16층에서 한국일보 기자들이 출동한 경찰들에게 사측의 편집국 불법 폐쇄에 대해 설명하자, 경찰이 "노사 관련 문제라 경찰이 적극 개입하기 어렵다"며 자리를 피하고 있다.
유성호
1954년 창간 이래 '정정당당(正正堂堂 )한 보도', '불편부당(不偏不黨 )의 자세'를 사시로 여겨왔던 <한국일보>가 용역을 동원한 언론 역사상 초유의 '편집국 폐쇄'로 사면초가의 처지에 놓였다. 1980년대 초반만 해도 국내 신문시장에서 매출액·발행부수 1위를 기록했던 <한국일보>가 왜 이렇게 됐을까?
사주의 200억원 배임 의혹과 편집국장 경질 등 보복성 인사에 따른 내부 종사자들의 반발로 시작된 <한국일보> 사태가 '편집국 폐쇄'라는 충격적인 결과로 이어진 데는 전적으로 사측의 책임이 크다. 무엇보다 이번 사태는 하루아침에 발생한 일이 아니다. 장씨 일가의 족벌체제로 운영돼 온 <한국일보>는 오랜 기간 경영난을 겪어오면서 노사 갈등이 심화됐다. 이렇게 된 데는 일차적으로 족벌체제의 방만한 경영이 가장 큰 원인을 제공했다.
창업주인 고 장기영씨(전 경제부총리)가 1977년 사망한 이후, 후손들이 번갈아 가며 경영을 맡은 신문사가 '사주일가'의 방만한 경영과 전횡으로 매각협상과 사주고발이라는 상황을 겪고 있는 것이다.
창업주의 장남이었던 장강재 전 회장 사망 후, <한국일보>는 창업주의 4남인 장재국 회장 체제로 전환됐다. 그리고 차남(장재구), 3남(장재민), 5남(장재근) 등 형제들이 계열사인 <서울경제신문>, <미주한국일보>,<일간스포츠> 등을 나눠 맡았다. 그러나 장씨 일가의 경영체제 하에서 <한국일보>는 무리한 증면 경쟁 등으로 경영난이 악화되고 경영권 분쟁과 장재국 전 회장이 회삿돈 횡령죄로 처벌을 받아 회장이 교체되는 등 불안정한 상태를 이어왔다.
특이 IMF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4300억원, 1999년 5590억원에 달하는 금융권 부채로 위기에 직면한 상황에서도 장씨 일가는 <한국일보>에서 거액의 주주단기대여금(2001년 당시 460억원)을 가져다 썼지만 이후 이 돈은 대부분 대손충당금 등의 방법으로 '탕감' 됐다. 이외에도 장씨 일가는 빌린 돈 이자를 회사에 떠넘기거나 근무하지 않으면서도 봉급과 해외출장비 등을 챙겼다는 게 <한국일보> 노조의 주장이다.
<한국일보>의 거듭된 추락... '장씨 일가' 전횡이 원인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한국일보> 위상은 추락에 추락을 거듭했다. 장재국 전 회장의 뒤를 이은 장재구 회장 역시 '중학동 14번지' 사옥 매각 과정에서 수백억원을 횡령한 의혹을 받아 왔다. 급기야 <한국일보> 노조는 지난 4월 "장 회장이 개인적인 빚을 탕감하기 위해 회사에 200억원 상당의 손해를 끼쳤다"며 그를 업무상 배임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다.
노조는 장 회장이 사재로 납입해야 할 추가 증자자금 약 200억원을 빌리면서 담보로 발행한 자회사 명의의 어음이 돌아오는 것을 막으려고 신축 사옥 건물의 우선매수청구권을 포기했는데 이는 업무상 배임에 해당한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사측은 5월 1일 이영성 편집국장을 해임함으로써 보복인사라는 기자들의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그후 두 달 가까이 '이중 편집국' 체제로 운영하는 것도 모자라 기자들이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킨 사람을 재차 편집국장에 임명하는 무리수를 둬 결국 위기를 자초하고 말았다.
사측은 지난 15일 편집국에 진입해 당직 근무 중이던 기자들을 밖으로 내쫓고 편집국을 봉쇄했다. 파업 중인 것도, 농성 중인 것도 아닌데 멀쩡히 일하고 있는 기자들을 강제로 내보내고 편집국의 문을 걸어 잠그는 한국 언론 사상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신문은 누구도 이용할 수 없다"는 창간정신이 결국 사주에 의해 처참하게 이용당하는 꼴이 되버렸다.
검찰, 사주 배임 의혹 사건 철저히 수사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