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만에 19번째 새앨범 <헬로>를 발표한 가수 조용필이 지난 4월 23일 오후 서울 방이동 올림픽공원 올림픽홀에서 가진 쇼케이스에서 신곡 '바운스'와 '어느 날 귀로에서', '헬로우'를 열창하고 있다.
이정민
돌아와요 부산항에, 잊혀진 사랑, 한오백년, 돌아오지 않는 강,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정, 대전 블루스, 잊기로 했네, 인물현대사, 외로워 마세요, 오빠생각, 뜻밖의 이별, 세월, 만나게 해주, 미워 미워 미워, 고추잠자리, 일편단심 민들레야, 내 이름은 구름이여, 여와 남, 강원도 아리랑, 길잃은 철새, 황성옛터, 님이여, 오빠생각, 따오기 등등...
위 제목들은 조용필 님이 낸 음반에 수록된 노래들 중 일부입니다. 80년대 초면 제가 중학교 다니던 시절입니다. 그때로 기억이 거슬러 올라가네요. 우리 집은 산 속에 있었기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TV도 없었지요. 번화가에 나서면 레코드 가게가 많았습니다. 번화가에 나가면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던 노래 중 제 심금을 울린 음성이 있었습니다. '조용필'이란 가수의 목소리였지요.
쥐어 짜는듯한 음색이 제 가슴을 파고 들었습니다. 한창 사춘기를 겪고 있던 때라 그런지 한 사람의 노래가 가슴에 박히니 다른 가수들 노래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쉰듯한 목소리가 좋습니다. 판소리 하는 분들의 목소리가 좋습니다. 장사익 같은 소리꾼 음색 말입니다. 제게 들려온 조용필 노래 중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그랬습니다. '끼룩 끼룩' 기러기 소리가 들리고 파도소리 들리다가, 무거운 전자오르간 소리가 이어집니다. 전주가 나간후 쉰 목소리가 들려 옵니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메기만 슬피우네~♪"길거리를 걸어가다가 들었는데 그 자리에서 푹 빠지고 말았습니다. 발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노랠 끝까지 들었습니다. 그 노래를 부른 가수가 누구인지 레코드 가게 들어가 물어보니 조용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레코드나 테이프를 살 수가 없었습니다. 집에 전기도 안 들어왔고, 전축은 커녕 작은 녹음기 하나 장만할 형편이 못 되었으니까요. 중학생인 제가 조용필 노래 듣겠다고 카세트를 사달라고 부모님을 조를 형편도 아니었습니다.
중학교 졸업 후 저는 취직을 했습니다. 사환으로 일했는데, 월급이 10만 원도 채 안 되던 때였습니다. 저는 첫 월급을 타서 부모님께 내의 한 벌씩 사드리고 테이프를 들을 수 있는 카세트를 샀습니다. 전기가 없으니 건전지로 작동시켰습니다. 그리고 조용필 님 노래 테이프를 사서 들었습니다. 제 처지와 제 감성에 잘 맞았기 때문일까요. 노래와 음색이 너무 좋았습니다. 들어도 들어도 질리지 않았습니다. 따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불러도 불러도 물리지 않았습니다.
나중엔 조용필 같은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10여년 동안 그를 흉내내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가수가 되고싶어 서울로 가출도 했었습니다. 서울서 고생만 하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수의 꿈은 접었지만 음악 좋아 하는 건 포기하지 못했습니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거나 돈줄, 연줄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대중음악계도 산업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나마 배웠습니다. 가수의 길을 걷고 싶었지만 결과적으로 여러가지 이유로 연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1988년 초 직장을 구했고 몇 년 간은 음악에 대한 미련을 못버려 피아노 학원도 다니고 작사, 작곡법도 배우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초에 노조활동하는 동료들을 만나면서 음악과는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제 인생에서 조용필 님 노래는 1990년 이전에 멈추었습니다. 1990년 이후부터 노조활동 하면서 이별, 만남, 사랑, 고독을 노래하는 대중음악과는 다른 노래를 알게 되었습니다. 노동자로 살면서 그 반댓말이 자본가란 사실도 알게 되었고, 학습을 통해 노동자와 자본가가 어떤 관계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대중음악이 자본주의 문화의 생산물임을 알게 되면서 차츰 거리를 멀리 하게 되었습니다. 대신 노동가와 노동시 같은 노동문화에 심취해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