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콘티넨털의 밀렌카 가족. 맨 우측이 밀렌카, 그녀의 어머니, 아버지. 그들은 우리를 지켜주는 수호천사였다.
최오균
택시강도가 남겨준 3달러의 여유(?)로 우리는 호텔 콘티넨털에 무사히 도착했다. 비센타 광장 근처에 있는 거리에는 노점상과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강도를 당하고 나니 거리의 사람들이 모두 강도처럼 보였다. 호텔로 들어간 우리는 신용카드로 체크인을 했다. 울고 있는 아내를 바라보며 데스크의 여직원이 아내와 나를 이상한 듯 번갈아 보았다. 그녀는 마치 우리가 부부싸움이나 하지 않았나하는 눈초리였다. 체크인을 하고 배정 받은 룸으로 들어가 아내를 달랬다.
"여보, 오늘 일은 우리가 그 택시 강도들에게 전생에 진 빚이라고 생각하고 잊어 버립시다. 몸을 다치지 않은 것 만해도 얼마나 다행한 일이오.""어떻게 금방 잊어버려요? 리마에서는 배낭을 도둑맞았는데, 여긴선 강도를 만나다니…. 오늘 밤이라도 당장 볼리비아를 떠나고 싶어요. 지금 생각 같아선 여행도 집어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요.""으음…. 그래도 여기까지 와서 아마존도 가보고 우유니 사막도 가 봐야 하지 않소?""아마존이고 우유니고 다 싫어요. 볼리비아가 싫어요. 그러니 라파스를 빨리 떠나요.""그럼 내일 아침 칠레로 넘어가기로 해요."나는 아내를 달래며 프런트로 내려와 칠레 아리카로 넘어가는 버스 편을 알아보았다.
"라파스에서 칠레 아리카로 넘어가는 버스가 있나요?""잠시만요. 시간표를 한번 체크해 볼 게요…. 내일 오전 6시 30분, 7시 30분 그리고 12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가 있군요.""지금 버스표를 살 수 있나요?""오늘은 너무 늦었고요. 내일 아침 일찍 나가면 살 수 있을 거예요. 부인은 좀 어떠세요? 계속 울고 계시던데.""네, 그런 일이 좀 있어서요.""무슨 일이신대?""사실은 라파스에 도착하자마자 택시강도를 만났답니다.""오, 저런! 택시 강도를…"그때 2층에서 아주머니 한 분이 내려왔다. 옅은 갈색 톤의 파마머리를 길게 늘어뜨리고 미소를 머금은 모습이 고구마처럼 친근하고 포근하게 보였다.
"저희 어머님이세요.""아, 그래요. 내일 아침 7시 30분 버스가 좋겠군요. 내일 아침 늦지 않게 좀 깨워주세요." "염려마세요. 내일 아침에 일찍 깨워드리지요."밀렌카라고 하는 호텔 직원은 매우 친절했다. 그녀가 우리가 택시 강도를 당했다는 딱한 사정을 애기하자 그녀의 어머니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미안하군요. 라파스에서 그런 일을 당하다니.""네, 경찰에 신고를 좀 하고 싶은 데 도와주시겠습니까?""그러지요. 일단 저희가 전화로 경찰서에 신고를 해 드리지요. 그러나 그 강도들을 잡기는 어려울 것입니다.""감사합니다. 그런데 이 근처에 현금을 찾을 수 있는 은행이 있나요?""네, 광장에 가가면 ATM이 있긴 한데, 밤이라 위험하니 내일 아침에 가서 찾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수중에 현금이 한 푼도 없어서 저녁을 사먹을 돈도 없어서요.""걱정 마세요. 그 정도라면 저희가 빌려드리지요."그러면서 밀렌카는 20볼리비아노를 나에게 건네주었다. 호텔 콘티넨털은 말이 호텔이지 가족들이 경영하는 작은 호스텔이다. 아버지가 사장이고 밀렌카와 그녀의 어머니가 종업원으로 운영하는 작은 호텔에는 레스토랑도 없다. 나는 밀렌카가 빌려준 돈을 들고 거리에 나가 빵과 우유를 사들고 들어왔다. 그러나 아내는 생각이 없다며 누워만 있었다.
"내일 아침 7시 30분에 칠레 아리카로 넘어가는 버스가 있다고 하니 그 편으로 아리카로 떠나요. 여보, 뭘 좀 먹어야지. 그래야 인슐린도 맞지."아내는 우유에다 빵 몇 조각을 먹더니 다시 돌아누웠다. 잠시 눈을 붙인 것 같은데 누군가가 우리 방문을 노크했다. 문을 열어보니 밀렌카의 어머니 마리나였다. 그녀가 약속대로 우리를 깨워 준 것이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다. 마리나는 호텔 앞에 택시를 대절시켜 놓았다고 했다. 그녀는 버스터미널까지 우리와 함께 동행을 해주겠다고 했다. 얼마나 고마운 사람들인가!
배낭을 챙겨들고 마리나와 함께 택시를 타고 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버스표를 사러 갔다. 마리나가 매표소로 가서 문의를 하더니 7시 30분 버스는 출발이 취소되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아내는 다시 울상이 되고 말았다. 다음 버스는 12시 30분에 있다고 했다. 할 수 없이 나는 12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표를 샀다. 마리나는 호텔로 가서 기다렸다가 다시 나오자고 했다. 버스터미널에서 기다리겠다는 아내를 달래서 다시 우리는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우리는 마리나와 함께 다시 버스터미널로 갔다. 12시 30분에 출발하는 버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버스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1시경에 출발을 한다고 했다. 이 버스도 제대로 출발을 할 수 있을러니 심히 염려가 되었다. 우리는 마리나와 함께 터미널에서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버스에 올랐다.
"마리나, 정말 고마워요. 우린 결코 당신을 잊지 못할 겁니다.""천만에요. 좋은 여행이 되기를 기도할게요."아내는 마리나의 손을 잡고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짧은 만남, 아쉬운 이별! 이별이란 언제나 그런 거다. 그렇게 인사까지 하고 버스에 올라 버스가 출발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차장이 올라 오더니 이 버스는 고장이 나서 출발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순간 아내는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흑흑, 떠나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게 하다니…""정말 황당하군. 어쩔 수 없는 일 아니요. 내려야지."나는 넋이 나간 아내의 손을 붙잡고 버스에서 내렸다. 버스가 떠날때까지 기다리고 있던 마리나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어찌 된 일이죠?""버스가 고장이 나서 오늘은 떠나지 못한다고 하는군요.""저런! 그럼 내일 출발하는 버스표를 알아보고 일단 다시 호텔로 돌아가지요.""그럴 수밖에 없네요."우리는 내일 아침 6시 30분에 출발하는 'Tur Bus' 티켓을 구입한 뒤 다시 콘티넨털 호텔로 돌아왔다. 이 버스는 칠레 버스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떠날 것이라고 마리나가 말했다. 도대체 호텔과 버스터미널을 몇 번이나 들락거려야 하는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지만, 할 수 없었다. 우리는 콘티넨털 호텔에서 하룻밤을 더 묵기로 하고 여장을 풀었다. 마리나와 밀렌카 모녀는 딱한 듯 우리를 바라보더니 호텔비용까지 절반으로 깎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