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11일 오후 여의도 당사에서 열린 중앙선거대책위원회 회의에서 김무성 총괄선대본부장의 얘기를 듣고 있다.
남소연
언젠가는 나올 말이었다. '여성 대통령'.
박근혜가 유력한 대선후보로 인식되기 시작한 이래로 '여성 대통령'은 머지않은 미래에 우리가 현실로 직면해야 할 문제였다. 그리고 예상대로 지금 박근혜는 '여성 대통령론'을 본격적으로 들고 나왔다.
이제는 한국에서도 여성 정치인들이 장관이나 당 대표를 맡는 일이 드물지 않지만(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주요 정당의 대표가 모두 여성이었다) 여전히 국회에서나 다른 모든 사회 영역에서 여성들의 진출 정도가 다른 선진국에 비해 턱없이 빈약한 것이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그런 여성들에 대한 처우나 차별적 인식이 획기적으로 개선되었다고 보기도 힘들다. 따라서 헌정사상 첫 여성 대통령이 배출된다면 이는 여성의 사회 진출과 지위 향상에 가장 획기적인 사건 가운데 하나로 기록될 가능성이 높다.
박근혜의 여성 대통령론, 철학은 어디에 이런 면에서 '여성 대통령론'은 현재 빅3 후보 중 박근혜만이 장착하고 있는 가장 유력한 중화기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찬찬히 뜯어보면, 박근혜는 이 막강한 중화기로 지난 10여 년 동안 사격훈련도 한 번 해 보지 않았을 뿐더러 기본적인 손질조차 하지 않은 게 아닐까, 혹은 전혀 만져보지도 않은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가 어렵다.
만약 박근혜가 여성 정치인으로서의 자각이 있었다면 그가 지난 14년 동안 국회의원으로서 살아온 삶의 궤적에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보도내용(
관련기사: 박근혜의 '14년 국회'는 문화재 사랑?) 을 보면 현실은 정반대인 듯하다.
이 기사에 따르면 박근혜 의원이 지난 14년 간 대표발의한 법안은 총 15건에 불과하다. 1년에 겨우 1건 정도만 대표발의한 셈이다. 그 15건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사안은 문화재 보호와 관련된 법안들로서 총 5건이다. 나머지 법안들 중에서도 여성의 사회적 지위향상이나 차별을 없애는 제도개선과 관련된 내용은 한 건도 없다. 굳이 들자면 2000년부터 호주제 폐지 '소신'을 지킨 것 정도에 의미를 둘 수 있겠다. (
관련기사 : 박근혜가 호주제 폐지 가장 앞장섰다? ) 이래서야 어디 5선 의원으로서 '여성 대통령'이 되겠다고 큰소리 칠 면목이나 설지,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서 보기 민망할 정도이다. 차라리 '문화재 대통령론'을 들고 나오는 게 더 낫지 않았을까?
정치인들의 교언영색이야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의 진정성을 바라는 것이 우리 국민들의 지나친 욕심은 아닐 것이다. 물론 나는 박근혜 후보가 지금 거짓말을 하거나 사기를 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역사 인식 등 다른 여러 사안에서도 그랬듯이 그의 발언에서 진정성을 찾기가 쉽지 않은 까닭에, 이번에도 자신의 본심과는 무관하게 '여성 대통령론'이 득표를 위한 공수표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크다.
사실 14년 정치인생 동안에 대표 발의한 법안의 건수나 내용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문제일지도 모른다. 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 대통령이 가져야 할 철학과 시대정신이다. 이미 우리는 강금실 전 법무장관이나 한명숙 전 총리를 통해 강단 있으면서도 부드러운 카리스마가 새로운 시대에 적합한 지도자의 덕목 가운데 하나임을 목격했다. 민주·반민주나 보수·진보의 대립구도 속에서는 남성적이고 투사적인 혹은 승부사적인 리더십이 주목을 받았지만, 이런 구시대적인 리더십은 이른바 '2013년 체제'와는 그다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안철수가 돌풍을 일으킨 데에는 상대적으로 '여성스런' 그의 리더십도 한몫을 하고 있다.
따라서 박근혜가 유권자들에게 '여성 대통령론'을 말하려면 적어도 자신이 여성 대통령으로서 어떤 리더십을 추구하는지 (혹은 갖고 있는지) 그 철학을 먼저 내보이거나 증명해야 한다.
흔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참여정부 5년을 평가를 할 때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대통령 당선 자체였다는 말을 하곤 한다. 한국사회의 이른바 '비주류의 비주류'로서 대통령에 당선된 첫 사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그가 대통령이 되기 전부터 한국사회의 비주류 정치인으로서 시대의 모순을 해결하는 노력과 비전을 전혀 보여주지 않았다면, 단지 그가 비주류 출신의 대통령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결코 이런 평가를 내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또한 여성 대통령으로서 시대가 요구하는 리더십과 철학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단지 생물학적인 여성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큰 의미를 갖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박근혜는 여성으로서의 차별적 상황을 극복하고 그 시대적 모순과 맞서 싸우며 대성한 정치인이라기보다 '박정희의 딸' 혹은 '영애 박근혜'로 인식된다. 따라서 여염집 딸들에게는 "박근혜처럼 하면 대통령도 될 수 있다"는 공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이는 노무현의 경우와 근본적으로 다른 지점이다.
여성 대통령에게 필요한 리더십의 조건 그렇다면 여성 대통령의 리더십은 무엇이어야 할까? (이것이 생물학적 성의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면, 나는 이런 리더십, 즉 사회적으로 규정되는 성인 '젠더'로서의 여성적 리더십은 생물학적 남성 대통령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덕목은 역시 모성애가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