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오후 서울 성북구 장수마을 '동네통신원' 이옥순씨(맨오른쪽)가 집에서 문정자씨, 최금규씨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조재현
이날 배씨는 매주 금요일 열리는 골목 회의를 안내하기 위해 이옥순(72)씨 집을 방문했다. 이씨네에는 골목에 사는 문정자(70)·최금규(86)씨도 '마실' 나와 있었다. 이씨도 골목 통신원이다. 배씨는 통신원들의 대표 역할도 맡고 있다.
지난 4월 서울시가 장수마을을 역사, 문화 특화마을 시범 대상으로 선정하면서 주민들의 회의가 잦아졌다. 주민들의 필요와 계획에 따라 마을이 새롭게 단장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씨는 "아들 같은 배씨가 놀러 오면, 밥이든 간식이든 주고 싶다"며 "처음엔 배씨가 너무 열심히 해서 억지로 모임에 나갔는데 이제는 내가 사람들을 모으게 된다"며 웃었다.
배씨는 지난해 11월, 장수마을에 들어왔다. 1년 남짓 살았지만 자기가 맡은 골목 13가구의 "숟가락이 몇 개인지 알고 있다"고 말한다. 그 사이 주민들의 신임이 두터워져 도시가스 설치 문제, 집수리 비용 상담은 물론 간단한 집수리도 직접 해준다. 마을 일꾼이 된 것이다.
그는 장수마을의 마을기업, '동네목수'(박학룡 대표)의 총무도 맡고 있다. 그가 이 마을에 들어오게 된 데는 동네목수가 빈집을 수리해 저렴한 월세로 방을 내놓은 것이 한몫했다.
이날 비 때문에 예정돼 있던 야외 작업은 취소됐고, 대신 공방에서 김금춘(76)씨가 서랍장을 제작했다. 백발의 김씨는 50년 넘게 목수 일을 해온 베테랑이다. 씨잉하고 돌아가는 절단기에 재단했던 나무 조각이 잘려나갔다. 움직임은 느리지만 자를 대고 기계를 돌리는 눈빛에서 장인의 눈길이 느껴졌다.
김씨는 "집에서 놀면 뭐해, 일하면 시간도 잘 간다"며 "마을에 빈집이 많지만 내가 하나씩 고쳐서 집 없는 사람들에게 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김씨는 "나이가 들어 힘이 없지만, 일을 하다 보면 젊어지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동네목수'는 집수리 전문기업이다. 수리가 필요한 집을 이웃이 고쳐주겠다는 것이다. 새로 집을 짓는 대신 고장난 곳을 고치고 도배하는 주택 개량 사업을 벌인다. 동네목수는 지난해 행정안전부의 마을기업 사업에 선정돼 5000만 원의 지원금을 받아 설립됐다.
동네목수는 현재 배씨를 비롯해 총 네 명의 마을 사람들을 정규직으로 고용하고 있다. 배씨 외에도 이중구(47), 김금춘씨가 집수리를 맡고 있다. 지난 5월 문을 연 '마을 카페'에서 지기로 일하는 김혜경(44)씨도 있다. 네 사람은 그야말로 '일터와 삶터가 일치하는' 마을 살이를 하고 있다. 직장과 거주지가 분리되는 도시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고용 형태다. 배씨는 마을 밖으로 나갈 일이 별로 없다고 말한다. 마을 안에서 일과 의식주를 모두 해결하는 온전한 마을 사람이다.
동네목수는 마을 주민에게도 일용직 일자리를 제공한다. 벽돌을 나르는 것 같은 간단한 일은 마을 주민에게 맡긴다. 지난 4월 주식회사로 전환해 주민이 참여하고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유도하고 있다. "10일 일했으면 하루 일당은 동네목수에 투자해"라고 권유한다. 한 사람, 두 사람 참여하다 보면 다른 사람도 '나도 한 다리 걸쳐 볼까'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다.
재개발 혼란에서 피어난 장수마을과 동네목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