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26일 치러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 당시 투표율. 18시부터 20시까지 투표율이 8.7%p상승했다. 만약 18시에 투표가 끝났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오마이뉴스
이 주류들 중 누군가는 낮은 투표율을 단지 바라기만 했던 것이 아니었다. 지난 10.26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중앙선관위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 공격은 투표소 확인을 방해해 투표율을 낮추려는 조직적 '공작'이었다. 경찰은 디도스 공격을 지시한 혐의로 최구식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의원의 비서를 구속했지만, 증거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그냥 음모론쯤으로 치부되었을 사건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해 4.27 재·보선에서도 투표율을 떨어뜨리기 위한 새누리당의 공작이 있었다는 증언이 핵심 당직자에게서 나오기도 했다. 지난 9월 24일 새누리당 전 청년위원장인 손인석씨는 경남 김해을에 출마한 김태호 후보의 당선을 돕기 위해 창원터널에서 거짓 공사와 차량동원으로 교통체증을 일으켰다고 증언했다. 이 공작을 위한 자금 1억원을 자신이 제공했다는 것이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이 사건은 중앙선관위 디도스 공격에 빗대어 '터널 디도스'라 불린다.
정치권력만이 아니다. 특정기업이 장악하고 있는 공단지역에는 노동자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표를 막기 위해 투표 시간 동안 의도적으로 휴업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선거 때만 되면 특정 기업 노동자들이 밀집해 있는 아파트 단지 등에서 기업 간부들이 노골적인 선거운동을 펼치고 야당성향의 조합원에게 밤새 설득작업을 벌이기도 하며, 투표를 막기 위해 근무시간을 조정하는 등의 꼼수도 흔히 벌어진다. 그나마 노조가 강한 곳에서는 투표시간을 보장받기도 하지만, 하청 노동자들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다.
2011년,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의뢰를 받아 비정규직 근로자 투표참여 실태조사를 진행한 한국정치학회(연구책임자 가상준)의 연구결과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대체로 일용직이나 임시직, 파견·용역·도급직, 그리고 회사규모가 작을수록 투표율이 낮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또한 일반 유권자의 투표 불참이 주로 자발적인 동기에 의해 이뤄짐에 반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65%가 '참여가 불가능한 상황'이라 답했다.
공직선거법 제6조 3항에는 "공무원·학생 또는 다른 사람에게 고용된 자가 선거인명부를 열람하거나 투표하기 위하여 필요한 시간은 보장되어야 하며, 이를 휴무 또는 휴업으로 보지 아니한다"고 명시되어 있지만, 현실에는 별반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투표일에 쉬는 백화점이나 대형마트가 없듯이 정상근무는 물론 회사 차원의 단체 야유회나 수련회 일정을 잡아 투표를 어렵게 하는 일도 비일비재로 벌어지고 있다. 지난 총선 당시 인천·경기지역에서 수학여행이나 수련회, 강제자율학습을 실시한 중고등학교는 14곳이나 되었다.
상황이 이러니 투표시간을 연장하라는 주장이 나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다. 선진국과 비교해 우리의 투표시간은 결코 길지 않다. 오전 6시부터 오후 6시까지로 투표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한국과 달리 영국과 이탈리아는 투표시간이 오후10시까지이고, 캐나다는 오후 8시 30분까지, 러시아와 스웨덴, 일본은 오후 8시까지, 미국 뉴욕 등 대부분의 주도 오후7시 ~ 오후 9시까지 투표가 보장된다.
이 때문에 각종 유권자 운동단체는 투표시간 연장 캠페인을 펼치고 있으며, 민변은 지난 9일 투표시간을 제한한 공직선거법 제155조 제1항에 대해 헌법소원을 제기했다. 그럼에도 여당은 차기 지방선거에서나 투표시간 연장을 추진해보자는 입장이다. 투표율을 떨어뜨리기 위해 디도스 공격이나 터널봉쇄까지 시도했다는 의혹을 받는 정당이 투표시간 연장에 찬성할 리 만무하다.
정치적 무관심이나 자발적인 거부로 인해 투표하지 않는 사람은 어쩔 수 없다 해도, 투표의지를 가진 이들의 참여까지 보장하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다. 비용이 문제될 순 없다. 민주주의를 더욱 풍부화하라고 국민들이 낸 세금을, 국민의 민주적 권리를 보장하는 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어디에 쓰란 말인가? 투표참여 의지를 가진 이들이 제대로 권리를 행사했다면, 수십조원을 강바닥 헤집는 데 낭비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투표시간 연장은 필요하지만...선거판도 달라져야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표시간 연장을 반대하는 여당의 논리에도 일말의 교훈은 있다. 새누리당 이철우 원내대변인은 지난 10일, MBC라디오<손석희의 시선집중>에 출현해 대선에서 투표시간 연장에는 반대하면서도 낮은 투표율이 "정치불신에 대한 국민의 표현"이라고 진단했다.
투표하지 않은 사람들 모두가 정치불신으로 인해 자발적으로 투표를 거부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정치가 정치답지 못하고 선거가 선거답지 못한 상황이 적극적인 투표참여의지를 만들어낼 수 없다는 점만큼은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