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율 100%보일러실은 이미 저수율 100%를 넘겼습니다.
대한민국은 물부족 국가에서 벗어났습니다.
신원기
"아니, 아무리 올라도 그렇지 무슨 전세를 44%나 올려달라고 하세요?"2012년 5월 25일, 전세 기간이 만료되었다. 군대에서 2년은 20년보다 길더니, 전세계약에서 2년은 너무나 빨랐다. 황진이의 시조처럼 시간을 베어내어 겨우내 이불 속에 묻어두었다가 그리운 님 오시는 날에 펼쳐내고 싶었지만, 그건 그저 나의 바람일 뿐이었다.
주어진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남거나 떠나거나. 남더라도 전세가격이 동결되거나 혹은 오르거나 할 수도 있겠지만, 집주인이 그 가격에 계약을 할 리는 만무했다. 몇 달 전부터 강북지역 전세가격이 크게 요동치고 있다는 보도가 매체를 불문하고 마구 쏟아져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세대란. 불안했다. 이내 그 불안감은 현실로 성큼 다가왔다.
44%, 오직 실력으로 평가받는 프로스포츠에서도 연봉 44% 인상은 보기 힘든 수치다. 시즌을 통째로 씹어 먹는다는 표현을 전문가들과 팬들이 입에 달고 'MVP', '수직상승'이라는 문구가 기사에 수시로 보이면 가능할까. 처음 듣고 놀랐지만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자본주의 하에서 건물주의 재산권 행사에 대해 탓하기는 어려운 일이니 말이다.
전세금의 갭을 줄여보기 위해서 이리저리 얘길 해봤지만, 주변 부동산 업체에서 단단히 바람을 집어넣은지라 나의 입김이 들어갈 여지는 없었다. 그래도 집주인과 친하게 지낸 덕에 격차를 많이 줄이긴 했지만 회사에서 단돈 10원이 모자라서 부도를 맞아도 부도는 부도 아닌가. 온전한 합의를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아쉽지만 나름 정이 많이 든 동네지만 떠나기로 결정했다. 안녕.
달라진 집주인, 그리고 어린왕자2012년 6월 19일, 우여곡절 끝에 이사를 했다. 촉박한 시일에 좀 쪼이긴 했지만 서두른 데는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 일단은 전세 물건이 씨가 말라버린 데다가 곧 장마철인데 장마철에 이사를 하기엔 상당히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혹시나 이삿날 비라도 오면 낭패가 아닌가. 집이 겉으로 보이기엔 허름해 보였지만 지하철역과 가깝다는 장점이 있는지라(사실 전에 살던 집은 지하철역과 멀어도 너~무 멀었다) 고심 끝에 큰맘 먹고 결정했다.
허름해도 사실 아침 일찍 나가서 밤에 들어와 잠만 자고 나가는 경우가 많으니 크게 상관없다는 나름의 합리적인 구실이 한몫 단단히 했고, 집주인인 노부부의 첫 인상이 선하다는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정말 만족할 환경은 아니지만 그래도 전세난이 이리도 심한 와중에 좋은 선택이라고 스스로 위안 삼았다. 물론 처음에는 말이다.
생텍쥐페리의 대표작인 어린왕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렇게 해서 어린 왕자는 여우와 정을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잘 있어." 어린 왕자가 말했다."잘 가. 내가 비밀 하나를 알려줄게. 아주 간단해.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볼 수가 없단다.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단다." 여우가 말했다."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어린 왕자는 잊지 않으려고 따라 말했다.뜬금없이 갑자기 왜 어린왕자 타령인가 싶겠지만, 그 동화 속 어린왕자가 잊지 않으려고 혼자 말할 때 나도 따라했었어야 했다. 그때는 그걸 몰랐다.
정말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