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곳곳에는 재건축 법에 반대하는 전단이 붙어 있다. "누구를 위한 주거환경인가요"라는 글귀가 눈에 띈다.
김세희
"이 건물 주인이 엄청 부잣집 사모님이래. 건물 지어놓고 이 동네에 한 번도 와본 적이 없어. 시세를 모르니까 우리가 전화 걸어서 201호 월세 얼마에 계약할게요, 하면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가는 거지."
부동산 아줌마는 내 편의를 봐서 월세를 싸게 해주는 것처럼 생색을 마구 냈다. 언제인가부터 이사한 건물의 주인 얼굴을 보기가 어려워졌다. 파주 신도시에서 원룸을 구할 때도 그랬다. 부동산 아저씨가 말하길 건물 주인은 목동에 살고 처음 건물을 지을 때 말고는 파주에 온 적이 없다고 했다.
세입자 계약과 관리를 전부 근처 부동산에 맡겨두는 것이다. 동거 커플인 우리는 굳이 아침저녁으로 집주인의 의심스러운 눈길을 마주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매달 꼬박꼬박 40만 원씩 우리 돈을 쥐는 남자를 길에서 마주쳐도 알아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에도 집주인 얼굴은 보지 못하고 부동산 아줌마와 계약서를 쓰고 도장을 찍었다. 나 혼자 살 것처럼 말했지만 아줌마는 자꾸 남자친구를 흘깃흘깃 봤다. 생각보다 부동산 중개료가 많이 나와 땀을 흘리며 동전까지 탈탈 털어 금액을 맞춰 드리자, 아줌마가 웃으면서 큰 소리로 "아이고 아가씨, 이렇게 돈이 없어서 어떻게 하냐"라고 말했다. 뭐라 대꾸할 말이 없어 애매하게 따라 웃기만 했다.
세입자와 집주인 사이의 신종 마름들이사하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짐을 싣고 오니 미리 넣어두겠다던 옵션이 하나도 없다. 부동산 아줌마는 집주인이 처리할 일인데 자기한테 맡기는 바람에 늦어졌다고, 오늘 중으로 중고 가게에서 물건이 다 배달될 거라고 했다. 설치하는 데 드는 비용은 주인에게 계좌로 받았다고 내 계좌로 보내주겠다고 했다.
문제는 에어컨을 설치할 때 생겼다. 설치비가 부동산 아줌마가 받아준 액수를 훨씬 넘었다. 아줌마한테 전화를 걸었더니 뭐가 그렇게 비싸냐며 깎아달라고 말하라고 했다. 이사하느라 지친 우리는 점점 화가 났다. 설치 기사는 실외기로 이어지는 길이대로 액수는 정확히 정해져 있다고 딱 잘라 말했다. 마음대로 에누리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는 다시 부동산 아줌마한테 전화를 걸어서 사정을 설명했다. 설치비를 미리 짐작해서 받아놓은 게 문제 아니냐고, 집주인에게 더 청구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줌마는 막무가내로 받은 돈에 맞추라고 신경질을 내는 것이었다.
"아가씨, 그 돈도 아가씨 생각해서 겨우 받아놓은 거야. 내가 미안해서 주인 분한테 어떻게 더 말을 꺼내?"기가 막힌 우리는 계약서에 적힌 집주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차분한 목소리의 중년 여성이 전화를 받았다.
"저, 새로 이사 온 201호 세입자인데요." "네?" 전화기 너머 목소리는 잠시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다 "아!" 하고 알겠다는 소리를 냈다.
"주인 분 맞으시죠?""아니요, 저는 일을 봐드리는 사람이에요. 제가 사모님 대신 부동산이랑 연락하고 월세를 받아서 전해드려요." 어안이 벙벙했다. 대체 몇 단계를 거쳐야 주인한테 연락이 닿는 거야?
"사모님 남편 분은 변호사세요. 두 분 모두 바쁘셔서 이런 일까지 직접 챙기지 못해요."묻지도 않은 말에 황당했지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모자라는 설치비는 우선 내고 이번 달 월세에서 제하겠다고. 그런데 전화기 너머 교양 있는 목소리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아가씨, 남자친구랑 동거한다면서? 사모님이 알았으면 아마 세 못주게 했을 텐데... 그냥 넘어가는 거예요. 보증금도 싸게 들어왔으니까 그 정도는 직접 부담하는 게 맞을 것 같은데요."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난다. 아줌마, 우리도 가정교육 잘 받으면서 자랐어요. 작지만 제대로 된 회사에 취직했고 나름대로 정치적으로 올바르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동거한다는 것만으로 그렇게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말 대신 나는 "네……"라고 내뱉고 전화를 끊었다. 전화기를 방바닥에 내려놓는데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남자친구도 착잡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