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스 드 발의 <공감의 시대>. 저자는 자연의 본능으로부터 인간이 서로 배려하는 마음을 배울 수 있다고 믿는다.
F. De Waal
인간은 공감의 존재다. 공상과학소설가인 필립 딕은 "공감 없는 사람은 실수로 만들어진 로봇이나 다름 없다"고 말했다. 제레미 리프킨은 '공감(empathy)'을 이렇게 정의한다.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의 정서적 상태로 들어가 그 고통을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는 것." 대단히 심오한 능력인 것 같지만, 사실은 침팬지 같은 유인원에서도 발견되는 특성이다. 공동생활을 하는 동물들에게 공감의 능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
남의 고통은 아랑곳 없이 제 욕심만 채우려 들 것이고, 서로 싸우다 결국 아무도 살아남지 못하게 된다. 예컨대 300년 후면 소멸하게 될 한국인들처럼 말이다.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데이비드 콜먼 교수는 한국이 현 출산율을 지속하면 300년 후에 인구 감소로 소멸하는 첫 국가가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공동생활을 하는 동물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한다. 혼자 살 수 있다면 애초부터 무리를 짓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협력해야 생존할 수 있기에 공동생활을 하는 것이고, 그러기에 상대 입장을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한 것이다.
동물학자인 프란스 드 발은 이런 '사회적 본능'에서 도덕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무리를 짓고 그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남을 돕거나 배려하는 것은 고귀한 이타심의 발로라기보다는, 자신이 살아남고 남들 속에서 평온하게 지내기 위한 방편인 셈이다.
드 발은 침팬지조차 배려와 협력의 본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는 지난 해 말 테드 강연에서 100년 가까이 된 낡은 기록영화를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우리에 갇힌 침팬지 두 마리가 밧줄을 하나찍 쥐고 열심히 당기는 장면이 담겨 있다. 동아줄은 우리 밖에 놓인 과일상자 양모서리에 연결돼 있는데, 꽤 무게가 나가기 때문에 혼자서는 끌어 당길 수 없다. 침팬지는 힘을 합쳐 줄을 모두 당긴 후 즐겁게 음식을 먹는다.
더 흥미로운 건, 두 마리 중 한 마리가 배가 부른 경우다. 배고픈 놈이 힘껏 줄을 당겨 보지만, 혼자서는 할 수 없다. 그는 배부른 동료의 어깨를 툭툭 치며 도움을 요청한다. 그리고 함께 밧줄을 당긴다. 배부른 놈이 가끔씩 한눈을 팔긴 하지만, 결국 끝까지 힘을 보태 준다. 하지만 상자가 코 앞에 도착했어도 배부른 놈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주린 놈이 과일을 독차지한다.
신기하지 않은가? 배부른 침팬지가 왜 도움을 베풀까? 어차피 자신은 노동의 결실을 얻지 못할 텐데. 간단하다. 자신도 언젠가 배가 고파질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 때가 되면 자신도 동료의 힘을 빌려야 할 것이다. 남을 배려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배려하는 것이다.
배달부는 엘리베이터 타지 말라?
사람은 어떨까? 여전히 집단생활을 하지만, 협력과 배려의 본능은 잃어버린 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아파트 주민들이 배달원에게 엘리베이터 금지령을 내릴 수 있을까? 제 입에 음식을 날라주고, 제 집 앞에 신문을 놓아주는 사람에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