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고향 선산 벌초 때 찍은 사진. 웬일로 어머니께서 동행하셨다.
조상연
스무 살 아리따운 처녀가 걸어서 시간 반이면 오갈 수 있는 이웃마을로 가마 대신에 군용트럭을 타고 시집을 왔다. 친정아버지와 시아버지는 호형호제하는 친구사이였다. 시집온 날 처음 본 신랑 얼굴은 그래도 밉상은 아니어서 슬그머니 웃음이 나오더라만, 시어미 '낯짝'을 보니 절로 한숨이 나오더란다. 아니나 다를까 인물값 한다고 시어미의 시집살이가 시집온 이튿날부터 시작되는데 재너머 친정엄마 생각할 겨를도 없을 정도였단다. 누구 얘기인가하니 바로 나의 어머니 얘기다.
그래도 종갓집에 시집을 왔으니, 남들 보란 듯이 시집온 그 이듬해 종손을 낳아서 시어미 품에 안겨놓았다. 손자라도 안겨놓으면 고초당초보다 매운 시집살이 덜할까 싶었더니 웬걸? 더 기가 살아서 펄펄 뛰더란다. 그리고 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을 장손자랍시고 품에 끼고 사는데 그 자식이 젖 뗄 때까지 젖 먹일 때만 품에 안아봤다니 말은 해 무엇하랴.
인물만 멀쩡했지 무뚝뚝하기만 한 신랑은 꿀 먹은 벙어리고, 그나마 시아버지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는데…, 새벽에 소 꼴 베러 나갔다 오시며 들판에서 따온 개구리참외며 주둥이 뻘겋게 벌린 석류를 시어미 몰래 앞치마 속에 넣어주더란다.
"오라질 년, 친정 다녀오랬더니 자고 와?"시집온 지 삼 년이 지나고 둘째아들을 낳으니, 종갓집에 귀한 손 낳아놓는다고 일가들은 칭찬이 자자하건만 시어머니는 "아들은 잘 낳는구먼!" 딱 한마디 하시더니 거들떠보지도 않으시더란다.
매사에 이런 식으로 어머니에게는 밥상머리에 마주앉기조차 싫은 시어머니지만 나에게는 어머니보다 더 좋은 할머니셨다. 할머니께서 큰아들과 큰손자 이외는 아예 사람취급도 안 했으니 둘째 아들과 둘째 손자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되는 그런 여분의 자식이었던 것이다. 아무튼, 어머니께서 둘째 손자를 안겨줬다고 상으로 시집온 지 4년 만에 친정 나들이를 하게 되었다.
걸어서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는 친정을 4년 만에 가게 된 것이다. 아버지가 자전거 뒤에 어머니를 태워 친정에 모셔다 드리고 왔는데, 이튿날 오후가 되자 할머니의 인상이 점점 일그러지신다. 호롱불 밑에 저녁밥상을 받아놓고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오라질 년이 어미 얼굴 봤으면 얼른 올 것이지…." 역정이 대단하시다. 견디다 못한 아버지가 결국 그 다음 날 점심을 먹고 자전거를 타고 어머니를 모시러 갔는데, 저녁 짓는 연기가 나도록 안 오신다.
밥을 먹고 할머니 젖을 꼭 움켜쥐고 누웠는데 저 멀리 콩밭에서 들릴 듯 말 듯, 한이 뒤섞인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그 소리를 한참 듣고 있던 할머니의 일갈. "어떤 년이 시어미 등쌀에 쫓겨났나? 밤에 청승맞게 웬 곡소리야? 집안 말아먹을 년 같으니."
콩밭두렁에 앉아 밤이슬을 맞아가며 청승맞게 아리랑을 부르던, 할머니의 말씀대로 '집안 말아먹을 오라질 년'이 내 어머니인 줄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나고서야 알았다. 어머니 하시는 말씀이 아버지는 자전거를 세워놓고 밤하늘만 바라보며 쓰다 달다 암말 없이 담배만 피워대더란다. 콩밭의 차돌멩이 하나를 손에 쥐고 한참을 그렇게 앉아 내 설움에 겨워 아리랑을 부르는데 나중에는 밤이슬에 젖었던 차돌멩이가 따듯해지더란다. 뻐끔뻐끔 담배만 피우던 아버지가 이제 그만 가자며 자전거를 어머니 앞에 대 놓기에 따듯해진 돌멩이를 있는 힘껏 던졌더니 아버지가 "억"하고 소리 한 번 지르고 마는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아버지가 베고 주무셨던 베개가 뻘겋게 물이 들어 있더란다.
큰아들에게 부메랑 돼 날아온 '어머니의 시집살이 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