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꼼수> 여의도 공연 "이제 니들이 쫄 차례다"30일 오후 서울 여의도공원에서 팟캐스트방송 '나는 꼼수다'(나꼼수)의 한미FTA 반대 특별공연이 열린 가운데, 수많은 시민들이 광장을 가득 메운 채 공연을 즐기고 있다.
유성호
<나꼼수>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결코 소수가 아니며, 우리들이 그렇게 직관적으로 느끼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었다. 그 때문에 청취자들은 <나꼼수>를 들으면서, 김어준의 "쫄지마 씨바" 한마디에 큰 위안과 힘을 얻는다.
획기적인 구전 스토리텔링 <나꼼수>를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더욱 재미난 사실들을 알 수 있다. <나꼼수>의 이야기 구조는 철저히 상향식(이른바 bottom-up)이다. BBK나 저축은행, 청계재단, 내곡동 사건 등 가장 구체적인 사례의 온갖 디테일한 면을 세세하게 다루는 것에서부터 출발한다.
보통 우리가 편안하고 재미있게 수다를 떨 때 이런 방식을 택한다. 문제는 우리 사회의 진보세력에게서 지금까지 들어왔던 이른바 '진보담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진보담론은 하향식(top-down)이었다.
<나꼼수> 이전의 이른바 진보논객들에게는 언제나 자기들이 생각하는 관념의 왕국이 있었다. 현실은 단지 자신들이 가꾼 그 왕국의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한 도구에 불과했다. 따라서 현실 자체에 대한 구체적인 관찰과 분석은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었다. 북유럽식 복지정책을 잘 연구하면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을 것이라는 관념은 '반MB'라는 절박한 현실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아주 단적인 예를 들자면, 기존의 논객들은 언제나 무슨 무슨 ~이즘으로 자신의 논리를 이끌어 나간다. 진중권이 대뜸 <나꼼수>에게 '너절리즘'이라고 대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념의 틀이 나쁜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현실과 끊임없이 교감하며 긴장감을 갖지 않을 때 비극이 시작된다는 점이다.
예전에 내가 학생 운동할 때 가장 많이 들었던 말 중의 하나가 "운동권은 항상 자신만의 결론을 이미 가지고 있기 때문에 토론 자체가 되지 않아. 그걸 나에게 강요하려고만 해"라는 말이었다. 지금의 진보세력에게도 이 말은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진보세력 하면 식상한 하향식 논리가 자동적으로 떠오르던 사람들에게 <나꼼수>의 상향식 구전 스토리텔링은 획기적인 서사였다. 말하자면 진보진영의 담론이 딱딱하고 교과서적인 문어체에서, 술자리 뒷담화나 미용실 수다마냥 익숙하고 재미있는 구어체로 대변신을 감행한 것이다. 진보담론도 발상을 뒤집으면 이렇게 재미있을 수가 있구나! MB와 보수세력에 실망하면서도 현존하는 진보세력에 못마땅했던 사람들은 <나꼼수>의 획기적인 시도에서 새로운 가능성과 희망을 보았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가능했던 데에는 현장의 디테일을 두루 섭렵한 정봉주와 주진우라는 걸출한 인물들의 역할이 컸다.
나는 <나꼼수>를 들으면서 어릴 적 시골집에서 화롯가에 앉아 할머니 할아버지가 들려주시는 옛날 이야기를 듣다가 잠들던 기억이 떠오르곤 했다. 화롯가에서 들었던 얘기들 중에는 동화책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도 있었고, 시골 동네분들 사는 이야기도 있었고, 또 집안과 가족의 내력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나꼼수>는 아이폰이라는 21세기 화롯가에서 네 명의 재담꾼이 들려주는 겨울밤 이야기와도 같다.
역설적이게도 <나꼼수>를 이끌고 있는 김어준은 상대적으로 (절대적인 기준으로는 그렇지는 않다) 하향식 논리에 더 가까운 인물이다. <나꼼수>에서 그가 '전지적 가카 시점'에 입각하여 '소설'을 쓰는 주된 역할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 서점가를 휩쓸고 있는 <닥치고 정치>에도 그의 이런 면이 묻어난다. 이 책에서도 드러나듯이 김어준은 인물의 캐릭터를 분석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부산 출신인 내가 경험적으로 돌이켜 보았을 때, 대체로 영남 출신은 사회현상을 바라볼 때 등장인물의 원초적인 피아식별로 환원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즉 이편인가 저편인가가 중요할 뿐 어느 쪽이 옳은가 혹은 그런 현상이 일어나게 된 사회구조적인 원인이나 역사적 배경은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상대적으로 가볍게 처리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한마디로 말해 조직폭력배의 논리와도 닮은 점이 있다. 힘과 주먹이 곧 법인 세계에서는 누가 옳고 그른가가 의미가 없다. 오직 우리 편인가 아닌가, 정글 속의 생존경쟁에서 누가 살아남았는가가 중요할 뿐이다.
그래서 박정희나 전두환이 옳은가 그른가보다도 이들의 쿠데타가 어떻게 성공했느냐에 관심이 더 많고 또 이들을 영웅시하는 경향이 아직 남아 있다. DJ가 당선되었을 때 "인자 갱상도 사람들은 다 쥑이삔다 카데" "부산 갱제 작살낼라꼬 일부러 삼성차 날려묵었다 아이가" 하는 우려와 걱정이 팽배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영화 <친구>나 <넘버3>의 정서를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