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순 야권통합 서울시장 후보가 24일 지지방문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있다.
남소연
이른바 '안철수 신드롬'을 타고 박원순 후보가 야권 단일 후보에 오를 때까지만 해도 그의 서울시장 당선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며칠 사이 한나라당 나경원 후보가 가히 파죽지세로 치고 올라왔고, 급기야 "내가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떨어지면 안 원장도 타격이 있을 것"이라는 박원순의 발언이 전해졌다. 앞뒤가 잘렸으니 정확한 말의 의도야 알 수 없지만 다급함이 담겨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짧은 기간 오르내리는 지지율 변화를 두고 어떤 이들은 한나라당과 나경원 측이 근거도 분명하지 않은 갖가지 루머들을 막무가내로 쏟아낸 탓이라고 풀이한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따지고 보면 나경원 역시 부친의 사학 재단에 대한 감사 무마를 청탁했다는 굵직한 의혹이 제기되는 등 박원순 못지않게 도덕성에 흠집이 났다. 따라서 문제는 다른 곳에도 있다.
알다시피 박원순이 보이고 있는 40%가 넘는 지지율은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원장이 일으킨 바람으로부터 힘입은 바 크다. 이른바 '안철수 현상'이라 불리는 '정치 반란'이 박원순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상식과 정의가 돈과 권력 앞에서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던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이 책을 뒤적이고 강연장을 헤매며 해법을 찾다 결국 선거라는 공간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그것이 '안철수 현상'의 실체다. 그리고 안철수 현상이 보여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폭발력도 놀랍지만 그것이 단지 몇 마디 말로 다른 인물에게 고스란히 옮겨간 점도 놀랍다. 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안철수가 박원순의 손을 잡아 주기 전까지 박원순의 지지율은 5% 정도에 머물렀다. 아마도 박원순이라는 인물이 가졌던 인지도가 대략 그쯤 되었을 것이다. 이는 그가 몸 담았던 '참여연대'나 '희망제작소', '아름다운 가게'에 대한 세상의 관심에도 못 미친다. 그만큼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고, 어쩌면 그 덕분에 안철수에 대한 지지를 고스란히 물려받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사람들은 텁수룩하게 수염을 기른 채 막 산에서 내려온 듯한(실제로도 그랬지만) 그에게 안철수에게서 느꼈던 것과 같은, 기존 정치인에게서는 느낄 수 없던 무색·무취·무당파의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안철수의 이미지를 어렵지 않게 투영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눈에 비친 박원순의 모습일 뿐, 그의 실제 모습은 아니다. 박원순은 분명 안철수와 다르다.
알다시피 박원순이란 인물을 빼놓고는 대한민국의 시민운동사를 쓸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그는 안철수만큼이나 자기 색이 분명한 인물이다. 실제로 선거 운동이 시작되면서 박원순은 자신이 오랜 세월 '지역'에 관심을 두며 쌓아온 청사진들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시민이 시장입니다"라며 자신의 몸에 밴 시민운동가의 언어로 이야기를 풀어가자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박원순의 서울시'가 자신이 안철수에게 기대했던 서울시의 모습과는 다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찌해야 할까.
'안철수의 대한민국'에 기대를 걸어도 될까잠시 다른 이야기를 해보기로 하자. 너무 앞서가는 이야기지만 말이 나온 김에 '안철수의 대한민국'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과연 '안철수의 대한민국'에 기대를 걸어도 될까.
이 물음에 답하기에 앞서, '왜 안철수일까'라는 물음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왜 문재인이나 심상정, 또는 조국이 아니라 하필 안철수인가를 묻는 것이다. 왜 단 한 번도 대선 출마 의지를 뚜렷하게 밝힌 적 없는 그가 선거라는 정치 공간의 한 가운데서 한국 사회를 뒤흔들고 있느냐는 물음이다.
앞서 '안철수 현상'에 대해 '상식과 정의를 향한 평범한 사람들의 정치 반란'이라고 풀이했는데, 위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서는 안철수라는 인물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알다시피 그는 자신이 가진 탁월한 능력과 통찰력으로 부와 존경이라는 성공을 거머쥔 인물이다. 여기에 더해 그는 인간주의에 기반을 둔 따뜻한 감성을 지녔으며, 세대를 뛰어넘어 사람들에게 말을 걸고 또 들을 수 있는 능력도 지녔다. 만일 시대정신이란 것을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다수가 공유·지향하는 이념, 또는 삶의 가치(욕망)'라고 정의한다면, 인간 안철수는 오늘날의 '시대정신과 가장 닮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우리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우리 시대의 멘토이자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인 셈이다.
사실 비슷한 반란이 10여 년 전에도 일어난 적이 있다. 당시 그 중심에는 노무현이라는 걸출한 정치인이 있었다.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이 일으킨 바람의 크기는 최근의 안철수 현상에 비쳐 봐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2002년 1월 당시 노무현은 지지율이 3.5% 밖에 안 되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정치인이었으나,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이라는 팬덤에 이어 개혁국민정당이라는 정당의 결성을 이끌어 내며 마침내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그는 이른바 삼김시대가 막을 내린 뒤 대중이 처음으로 선택한 정치 지도자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