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8월 18일자 <동아일보>는 김윤환 당시 민자당 사무총장이 '충청도 핫바지' 발언배경을 해명하고 이를 보도한 대전매일신문사를 상대로 30억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했다고 보도했다.
동아일보
'멍청도'가 충청도를 비하하는 말이었던 데 비해, '핫바지(솜 넣은 바지)'는 충청도와 전혀 무관한 말이었다. 핫바지는 해방 후 시골 사람 또는 촌뜨기를 뜻하는 말로 '고무신', '되민증(도민증)' 등과 함께 유행했었다. 1985년에 김성한이 <동아일보>에 연재한 소설 <임진왜란>에도 '핫바지'가 나오지만 충청도와는 무관하게 쓰였다.
한편 김영삼의 민자당에 합류하여 대표최고위원으로 있던 김종필은 정권 실세들의 냉대와 부패정치인 청산 작업 그리고 내각제 약속 파기 등에 분개한다. 그래서 그는 1995년 초 충청권 의원과 대구· 경북권 일부 의원들과 함께 당을 따로 차리기로 작심했다.
김종필의 신당설이 나돌자 당시 김영삼 정부 정무장관 김윤환은 기자간담회에서 "신당 얘기만 나오면 대구·경북을 들먹이는데 우리가 무슨 핫바지냐?"고 말한다. 그런데 <대전매일신문>이 '김윤환 정무, 충청도 핫바지 발언 물의'라는 제목으로 비틀어서 보도함으로써 충청도에서 '핫바지' 파문이 일어난다. 차후 이 신문은 사과정정보도를 냈지만 파문의 진정 효과는 거의 없었다.
민자당에서 나와 자유민주연합을 만든 김종필은 작정하고 '핫바지론'을 이용했다. 그는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창당대회에서 충청도식 억양으로 "우리가 핫바지유? 우리는 핫바지가 아니란 말유"를 연발했다. 그는 '충청도 핫바지론'이 지역감정을 부추긴다는 지적에 대해 "그런 말을 감정적으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보다 실제로 핫바지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충청도민들은 김종필에게 표를 몰아주었다. 자민련은 1995년 6·27 지방선거에서 강원도를 포함, 충·남북 광역자치단체장을 석권하며 4명을 당선시켰다. 다음 해인 1996년 총선에서도 김종필은 예의 '핫바지' 행군을 멈추지 않았다. 결과 자민련은 무려 50석을 가지는 우량정당(?)으로 거듭날 수가 있었다. 정치생명을 걸고 신당을 창당한 김종필을 살려낸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충청도는 핫바지가 아니다'고 하는 이른바 '충청도 핫바지론'이었던 셈이다.
1997년 다시 대선의 계절이 다가왔다. 김종필은 한나라당 이회창과 국민회의 김대중 사이, 달리 말해서 영남과 호남의 대결구도 사이에 다시 끼게 되었다. 지역구에서 여러 명을 뽑는 총선은 해볼 만하지만 전국에서 한 명을 뽑는 대선은 김종필에게는 '쥐약'이었다. 그는 이념적으로는 근사하지만 아들의 석연찮은 병역 문제로 인기가 하강 국면에 접어든 이회창 대신 '지역등권론'을 내세우는 김대중을 선택, 이른바 'DJP 연합'을 성사시켜 김대중을 당선케 함으로써 다시 집권여당의 일원으로 올라섰다.
이후 야당인 한나라당의 인기가 오르고 충청도를 연고지로 내세우는 이회창이 한층 부각되면서 김종필의 충청도 영향력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자민련은 2000년 총선에서 17(지역구 12)석)으로 위축되었다. 그리고 2004년 총선에서는 고작 4석에 그쳐 비례대표에서 탈락한 김종필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계를 떠나게 되었다.
영호남보다 유연한 충청인의 정치 성향 한편 영·호남과 달리 충청인의 정치적 선택은 일찍부터 유연성을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한 일이다. 이인제가 독자출마하고 김종필이 김대중을 지지하는 상황이었던 1997년 대선에서, 충청인은 이회창과 이인제에게 30% 안팎의 비슷한 지지율을 보낸 반면, 김대중에게는 충북과 충남에서 각각 37.4%와 48.3%의 높은 지지를 나타내 김대중의 당선에 일조했다.
또한, 이인제가 이회창을 지지하고 김종필이 중립을 선언한 가운데 치러진 2002년의 대선에서, 충청인은 충남인을 자처한 이회창보다 노무현을 선택해 50%의 높은 지지를 보냄으로써 당선에 거의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당시 노무현과 이회창의 표차 57만 표 중 25만 표가 충청표였다. 물론 여기에는 노무현의 신행정수도 공약이 주효했을 것이다. 2003년 헌재가 신행정수도 위헌 판결을 내리자 당연히 충청도에서는 다시 한 차례 '멍청도', '핫바지론'이 비등했다.
2007년 대선에서 충청인들은 이명박을 선택했지만 이회창에 대한 지지도 만만치 않게 보여주었다. 이명박은 대전 36.2%, 충남 33.9%, 충북 41.9%를 득표했고, 이회창은 대전 28.8%, 충남 32.9%, 충북 23.2%를 득표했다. 그런데 이명박이 세종시 법안을 개정하려 하자 다시 '멍청도', '핫바지론'이 제기된다. 최근의 충청인들은 세종시법 개정을 무산시킨 박근혜에게 비교적 높은 지지성향을 보이고 있다.
이런 점에서 충청도는 영·호남과 달리 언제든지 정책과 이슈에 따라 지역주의 투표가 완화되는 정치성향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핫바지론'의 생명력은 의외로 질긴 면이 있다. 대선에서 세 번이나 실패한 이회창은 2008년 총선을 앞두고 심대평 당시 국민중심당 대표와 함께 자유선진당을 만들었다. 그들은 김종필이 했던 그대로 '핫바지론'을 들먹였다. 급조된 자유선진당은 한나라당 대세 속에서도 충청권에서 18석(전국구 포함)이나 얻었다.
이회창은 2009년 세종시법 개정 논란이 일자, "세종시 건설계획을 축소 또는 폐기하려는 시도가 15대 총선 때의 충청도 핫바지론을 연상케 한다. 한나라당의 사기극을 막겠다. YS, DJ, 노무현에게 속고 이명박에게까지 속아 다시 곁불 쬐는 핫바지가 되겠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그는 한나라당 대선후보시절에는 노무현이 신행정수도 공약을 했을 때 아무런 입장도 피력하지 않았었다.
한편 은퇴 후 한나라당 명예고문으로 위촉된 김종필은 "이회창씨는 예전에 국무총리일 때 연설부탁을 받고는 본인은 충청도 출신이 아니라고 했다. 이회창씨는 충청도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예산사람도 아니다"고 말했다.
다시 뭉친 어제의 충청 인사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