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9월 2일 오후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열린 '제46회 방송의 날 기념식'에서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오른쪽)이 엄기영 MBC 사장과 인사를 나눈 뒤 안경을 고쳐쓰고 있다.
유성호
그랬기에 2009년 여름,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이사장이 된 김우룡씨가 엄기영 체제에 손을 보겠다고 칼을 빼들어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당신에게 <오마이뉴스>를 통해 긴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관련기사:
그들이 무슨 짓을 해도 결코 스스로 물러나지 마십시오).
그 즈음 나는 나를 KBS 사장 자리에서 강제로 해임시키기 위해 옭아 맨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위반'(배임)이라는 무시무시한 죄명의 법정에서 '무죄' 선고(1심)를 받았지요. 나는 이 정권이 방송장악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라는 점을 온 몸으로 체득한 터였습니다. 검찰뿐 아니라 감사원, 국세청, 방송통신위원회, KBS 이사회 등 정권은 온갖 기관들을 총동원하여 나를 강제로 쫓아내고, KBS를 접수·장악했지요.
그런 일이 2009년 여름에 MBC에도 막 일어나려 하고 있었습니다. MBC 이사회인 방문진 이사들이 모두 교체되었습니다. 김우룡씨가 이사장이 되었고, 다수의 친정권 이사들이 입성했지요. 김우룡 이사장은 선임되자마자, 점령군 행태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MBC에 문제가 있다면 방문진이 감독을 제대로 안 한 책임도 크다. 보고를 받은 뒤, 뭐가 문제이고 누구의 책임인지 살펴볼 것이다."(2009년 8월 13일 기자회견에서) 이 발언을 한 뒤 2주도 지나지 않아 이번에는 훨씬 강도가 높은 발언을 했습니다.
"그간 (경영진이) 잘못한 책임은 물어야 한다. 이사들이 질의를 하고 추궁하는 과정에서 (엄기영 사장이) 알아서 물러나겠다고 하면 좋지 않겠느냐.… 내가 한 말들을 잘 들여다보면 그 속에 무슨 메시지가 담겨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이사들의 의견을 물어서 이사회에서 (경영진 교체 여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2009년 8월 26일 <한겨레>와 전화 통화)
김우룡 이사장의 '엄기영 축출' 작전당시 그는 이 때 밝힌 것보다 더 구체적으로 '엄기영 사장 축출'을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2010년 <신동아> 4월호 인터뷰를 보면 당신의 '해임 날짜'까지 구체적으로 거론했습니다.
- (2010년 2월 8일 엄기영 사장 사퇴는) 사실상 예정됐던 일이군요."내가 사실 지난해(2009년) 8월 27일 엄 사장을 해임하려 했어요. 하지만 정무적인 판단으로 미룬 겁니다. 취임 직후 업무 보고를 받을 때부터 (내가) MBC의 문제를 계속 제기했습니다. 전략이었죠."- 어떤 정무적인 판단을 하신 것인지."국정 감사도 앞두고 있고 또 정운찬 총리 임명 문제도 있고 해서…."- 엄 전 사장의 사퇴는 예상하신 건가요."솔직히 2월 말까지는 버틸 줄 알았어요. 그 때까지도 안 나가면 해임하려고 했어요."이 정권의 야만성과 폭력성을 직접 경험한 나는 당신에게 가해지는 해임 압박과 박해를 보면서 조금이나마 위로와 격려가 되고자 글을 썼습니다. 그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지요.
오늘, 엄 사장 당신에게 편지를 쓰게 된 까닭은 당신이 처해 있는 지금의 상황, 당신이 가슴 저미게 느낄 고뇌와 고통, 북풍 휘몰아치는 허허벌판에 내동댕이쳐진 것 같은 외로움을 제가 지난해 비슷한 처지에서 절실하게 경험한 터여서, 그 고뇌와 고통, 외로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입니다. 지금 당신이 받고 있는 천근 무게의 사퇴와 해임 압박, 그 방면에서는 제가 선배니까요. 핍박과 박해를 '역사의 축복'으로 받아들이라 했는데그러면서 나는 당신에게 가해지는 핍박이나 박해를 괴로움으로 받아들이지 말고, 적극적으로 역사의 축복으로 받아들이라고 권했지요.
그 첫 편지가 <오마이뉴스>에 나간 날 오후, 당신은 내게 전화를 하여 "격려해 줘서 감사하다"는 뜻을 전했습니다. 나는 "엄 사장이 잘 버티실 것으로 믿는다"며, "응원하는 이들이 많으니, 외로워하지 말라"고 답했지요.
그 뒤에도 MBC에는 김우룡 이사장의 강경 드라이브가 계속되었습니다. MBC를 '김우룡 섭정체제'라고 부르기도 했고, '김우룡 사장, 엄기영 이사'라는 비아냥까지 나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임원 선임 문제를 둘러싸고 갈등이 다시 빚어졌고, 밴쿠버 동계 올림픽에 즈음하여 감사원이 방문진 감사에 들어갔다는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지난해 2월 5일 금요일 오후였지요. MBC에 볼 일이 있어서 찾아간 길에 사장실에 잠시 들러 당신과 함께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당신은 그 즈음 여러 분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격려와 위로를 받고 있다며, 참으로 고마워 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당신이 힘든 상황에서도 잘 견디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했지요. 그랬기에 그 다음 월요일, 당신이 사퇴를 발표하고 MBC를 그만 두었을 때, 어리둥절했습니다. 바로 사흘 전 만났을 때 그만 둘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당신은 떠났습니다. "돌이켜 보면 사장으로 재임한 2년은 MBC 역사상 그런 2년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다사다난했고, 상황은 저의 예상을 훨씬 넘을 만큼 더 복잡한 것이었다"고 당신은 되돌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남아있는 후배들을 헤아리며 그렇게 당부했지요. "후배들에게 무거운 짐만 넘기고 떠나는 것이 너무 미안하고 안쓰러울 따름"이라고. 그러면서 "앞으로도 좋은 방송 만들고, 대한민국 최고의 일류 공영방송 MBC를 계속 지켜 달라"고.
김우룡 이사장의 '거침없는 하이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