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평양성>의 이준익 감독.
권우성
- 감독님을 '사극전문 영화감독'이라 칭하는 언론도 있습니다. 사극을 잘 만드는 비결이 따로 있나요?"저는 어려서 서양의 사극을 많이 보고 자랐습니다. 서부영화는 미국의 사극이었죠. <벤허>니 <십계>니 이런 것들은 모두 할리우드 역사영화였지요. 그걸 보고 자란 서양의 감독들은 이제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를 만듭니다. 이들은 역사를 갖고 리얼리티를 넘어 아예 판타지로 갔습니다. 한국영화도 언젠가는 <해리포터> 같은 작품을 만들 것이고, 거기까지 가려면 끊임없이 우리 역사를 갖고 계단을 쌓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계단의 시도로 <황산벌>이 한국영화 표현양식에 기여한 부분이 분명 있다고 생각해요. <왕의 남자> 역시 상업적이라고 말할 수 없는 소재와 이야기 방식을 놓고 커다란 성공을 한 건대, 그만큼 우리는 잠재력을 충분히 갖고 있는 나라라는 거죠.
날마다 인문학이 부재하고, 문화콘텐츠 생산만이 국가경쟁력이라고 외치는데, 그 문화콘텐츠라는 게 어디서 나오느냐, 핵심은 역사라고 생각해요. 역사 없이 철학 없고, 철학 없이 문학도 없다. 5000년 역사를 가진 우리 교과서는 이리도 얄팍할진대, 불과 200년 역사를 가진 미국 역사책은 엄청 두껍다는 사실.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역사를 팔아먹고 사는 것인가. 미래 콘텐츠의 보물창고는 역사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온몸으로 도전하는 것이지요."
"영화라도 역사교육 해야지... 보물창고를 여는 무모한 도전 계속할 것"- 우리나라는 역사교육에 소홀하잖아요. 이명박정부 초기엔 역사도 영어로 가르치겠다고 해서 논란이 일었지요.
"영화라도 역사교육을 해야지. 예전에 소설가들이 교과서가 세상을 못 바꾼다고 소설로 세상을 바꾸겠다며 소설을 쓰지 않았습니까. 소설이 대중적 힘을 잃고 이제 그 짐을 영화가 떠맡았다고 생각해요. 할리우드 상업영화로 획일화, 장르영화로 획일화 되는 현재 어찌됐든 중견감독으로서 이준익의 소명이 있다면 후배감독들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도록 보물창고를 여는 무모한 도전을 계속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평양성>이 미래 사극을 여는 새로운 장이 될 것이라는 것도 이 맥락의 해석입니까."역사 속에 기록된 사실을 놓고, 벌떼와 동물을 이용한 신무기가 나돌고, 쌀 튀밥이 날라 다닙니다. 이 난센스가 정교한 인물 간 심리와 잘 섞여 '나까 코미디'(싸구려 코미디)로 보이지는 않지요. 뭐 저런 게 다 있어? 그런 건 아니지요? 후훗. 드라마 특유의 핵심은 심리적 정교함에서 획득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 핵심을 놓치지 않으면서 이 황당한 설정이 개연성 있게 드라마타이즈 된다는 것은 쉬운 게 아닙니다."
- 전쟁도 저렇게 하면 재밌는 놀이가 되겠다고 싶기도 했지요."저는 놀이에 대한 생산성을 강조하는 감독입니다. <왕의 남자>에서도 광대들의 놀이판이 벌어지고, <황산벌>에서도 전쟁 중에 다양한 우리네 놀이들이 등장합니다. 장기, 응원전 등등. 이 모두는 광장드라마라는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현대사회는 골방에서 모니터를 보면서 광장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는 20세기 광장에서 세상을 배웠습니다. <평양성>에서도 광장이 주 무대이지요. 연개소문 큰 아들 남산(윤제문 분) 둘째 아들 남건(류승룡 분), 갑순이, 거시기 등 수많은 병사들 모두 광장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소통하고 운명이 결정됩니다. 적어도 뒤에서 칼질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게 올바른 세상 같아요. 광장의 놀이를 통해 미래를 만들어가자 그런 말을 하고 싶었어요."
- 트위터나 페이스북 같은 온라인 광장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굉장히 좋지요. 오프라인의 광장이 사라진 시대에 온라인 광장에서 젊은이들이 외로움을 채운다고 생각합니다. 역시 극장도 마찬가지죠. 껌껌한 공간 안에서 수백 명이 함께 앉아 영화라는 광장과 소통하는 것이지요. 영화에 열광하는 젊은이의 에너지는 광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라고 해석합니다."
- 영화 중에 문디와 김유신 장군이 특공대를 꾸리면서 노사협상을 벌입니다. 논 20마지기를 원하는 문디에게 김유신 장군이 30마지기!를 부릅니다. 아주 쿨합니다. 현실에선 이런 '사장님'들이 거의 없잖아요. (웃음) "세상의 딜레마죠. 거시기가 고구려 병사로부터 칼로 위협을 받으면서 스피커 앞에 서서 김유신 장군을 비난합니다. 전쟁은 결국 권력자들에게만 유리한 것이지 민초들에게 좋을 건 없다고 갈파하지요. 이때 김유신이 다 인정합니다. 다 맞는 말 아이가? 세상은 개인의 목소리를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정한 집단이 집단의 힘으로 개인에게 폭력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개인의 목소리를 인정하면 희망이 보입니다. 묵살하고 멸시하면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됩니다. 그래서 나는 집단이 개인의 목소리를 경청할 때 희망이 생긴다고 봅니다. 결국 이 영화에서도 거시기가 희망을 만들었던 거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