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식 KBS 심의위원
그러다 '녹취록 사건'이 터졌다. 2006년 11월 9일 여의도의 한 음식점에서 강동순 당시 방송위원회 상임위원(전 KBS 감사), 윤명식 KBS 심의위원,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 한 지역 방송사 사장, 제작사 대표 등 5인이 모여 온갖 이야기를 나눈 것이 그대로 녹취가 되어 이듬해 공개된 사건이다. 대화내용이 너무도 '친한나라당'적이었고, 노골적이어서 파장이 컸다.
"이제 우리가 정권을 찾아오면 방송계는 하얀 백지에다 새로 그려야 된다" "한나라당 대선 승리를 도와야 한다" "도와준다는 거는 남의 일이라는 얘기" "우리는 한 배" "한 배가 아니라 우리 일이다"라는 등의 이야기가 오갔다. 윤명식 심의위원은 유승민 한나라당 의원에게 "오늘 저 영광입니다. 근데 의원님 한 배입니다. 좌초되면 저희는 죽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이런 대목도 있다. "정연주라는 사람은 참 사악한 사람이거든요"라고 윤명식씨가 말하자, 강동순 방송위원은 이를 받아 "사악한 놈이죠"라고 답하기도 했다. 그들은 정말 나를 증오했던 모양이었다.
이런 발언이 공개되자 언론계와 정치권이 발칵 뒤집혔다. 그리고 KBS 내부도 시끄러웠다. KBS 피디협회는 윤명식 심의위원을 제명했다. 그리고 회사 인사위원회가 열려서 윤명식 심의위원에게 6개월 정직 처분을 내렸다. 당시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한나라당 편을 드는 심의위원을 왜 파면하지 않았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윤명식씨는 그 뒤 KBS를 상대로 6개월 정직 처분 무효소송을 냈다가 패소했다.
윤명식씨 경우 징계 원인이 나에 대한 비판이나 비방이 아닌, '녹취록 사건'으로 인한 것이기는 하다. 어쨌든 5년 4개월 재임 기간 중 나에 대해 비판적인 인물이 부정과 관련된 일이 아닌 건으로 실제 징계를 당한 유일한 경우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그랬기에 KBS 경영진이 비판의 목소리를 내온 사원들에게 대규모 징계 통보를 하고, 이와는 별도로 비판적인 글(또는 짧은 댓글)을 썼던 사원들을 찍어내 징계를 하는 등 여러 인사상 가해행위를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온갖 생각이 교차한다.
이 '기이한 불균형과 비대칭'맨 먼저 드는 생각은 지금 KBS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그리고 그동안 있어온 일들이 이명박 정권이 해온 행태와 너무 닮았다는 점이다. 내 편이면,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러도 가볍게, 관대하게 봐주고, 심지어는 감사를 새로 해서라도 혐의를 벗겨 주려고 노력하는가 하면, 김인규 체제에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인물에 대해서는 가혹한 처벌과 인사상 불이익을 서슴지 않아 왔던 것이다. 이번 대량 징계 통보가 이런 흐름의 정점을 가르키는 것처럼 보인다.
요즘 참 그런 생각이 많이 든다. 세상과 역사를 보는 눈, 가치관, 지향하는 방향 등이 이명박 정권, 한나라당, 조중동 등 수구 기득권 세력과 비슷하면 살아가는 방식과 행태, 사람 됨됨이 등 여러 면에서 참으로 비슷하다는 점이다. KBS 내의 지금 기득권 세력도 마찬가지다. 특히 제 편 감싸기와 봐주기, 그리고 반대편에 대한 혹독한 가해 행위의 측면에서 이들은 마치 일란성 쌍둥이인 것처럼 닮았다.
이번 60명 대량 징계 통보 대상자 가운데 특히 눈에 띄는 대상은 파업참가 아나운서에 대한 높은 징계율이다. 모두 17명의 아나운서가 파업에 참가했는데, 징계 통보를 받은 대상자가 무려 14명이나 되어 비율로 치면 82%나 된다. 새 노조의 파업에 참가한 대부분이 기자, 피디였고, 그 숫자가 800명을 훨씬 넘었으니, 아나운서 징계율과 같은 82%를 적용하면 최소 600명 이상의 기자, 피디가 징계 대상자가 되어야 했다. 놀라운 불균형과 비대칭이다.
일반 국민에게 더 많이 알려진 아나운서의 파업 참여가 그만큼 더 '아팠기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기자, 피디에 비해 숫자가 얼마 되지 않은 '약자'이니, '엄중한 징계'를 해도 괜찮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까, 파업 참가 아나운서에 대한 KBS 사측의 징계 의지는 '놀라운 불균형과 비대칭'이 말하듯 상식의 수준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나도 징계하라"- 대량징계 통보후 나타나는 KBS내 풍경이 '기이하고도 무모한' 대량 징계 통보 후에 KBS의 젊은 기자, 피디 사이에는 "나도 징계하라"는 '자진 징계 요구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소식이다. <미디어 오늘>이 이들 가운데 몇 몇 기자의 목소리를 전했다.
저는 아직 연락이 없어서 섭섭합니다. 저는 21일 동안인가 무계결근이라고 근태 기록에 적혀 있어요. 저는 왜 명단에 없나요. 2차 명단이라도 준비하고 계신가요.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자랑스러운 명단에 들 수 있는지 좀 알려 주세요. 뭐 같은 시절에 뭐 같이 방송하는, 전두환이 시절에 버금가는 명비어천가 부르짖는 이런 시기에, 어디 가서 KBS라고 소속 밝히기 부끄러운 이런 시절에, 이 치졸한 짓거리들에 저항했다는 기록이 남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인데, 그래야 자식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기록을 내보일 수 있을 텐데. 잘 찾아보세요, 저도 걸면 걸 수 있는 게 있을 겁니다. (황상길 기자)권력이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아무리 처벌을 해도 조롱받는다. 촛불 시위 때의 '닭장 투어'를 기억하는가. 지금 KBS 노동자 사이에서는 '어쩌다 징계를 받았느냐'가 아니라 '왜 나는 뺐느냐'는 얘기가 오간다. 머리가 있다면 생각을 해보라. '노조를 인정하라'는, 단체협상에 성실히 응하라는 요구를 걸고 쟁의행위 찬반투표까지 거쳐 합법적으로 파업을 했다. 회사는 이 파업을 불법이라 딱지 붙였고 참가자를 대량 징계했다. 1970년대 어느 공장이 아니라 물경 2010년 KBS에서 벌어진 일이다. (범기영 기자)비징계자들이 나도 제발 좀 징계해주면 안 되는 거냐고 불퉁거리는 흐뭇한 정경...나도 나도 (징계하라). (김석 기자)징계 대상자 아닌 사람들 모여서 성명 한 번 내면 어떨까요? ㅎㅎ 진지하게 드리는 말씀. (심인보 기자)전원 징계 그날까지!! 새 노조, 새 역사 홧팅~!! (이수연 기자)파업 관련 징계대상자가 통보된 뒤 KBS 젊은 기자 반응들 '썅 난 왜 빠졌어' '쟤가 뭘 했다고 징계야'. 근데 정말 난 왜 빠졌지? 전관 예우가 아니라 전과자 예우인가. (이철호 기자)'진종철 폭행사건' 처리의 상징성-지금 KBS의 생얼굴앞에서 언급한대로 KBS 새 노조는 이러한 대량 징계 통보가 전해지자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 내가 KBS 새 노조의 성명서를 읽으면서 눈길이 간 곳은 결연한 의지를 밝힌 대목, 즉 "KBS 본부(새 노조)와 조합원은 징계를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징계에 맞서 더욱 가열찬 투쟁을 전개할 것...그리고 끝내 징계를 무효화할 것"이라고 밝힌 내용과 함께 일반인이 읽었다면 그냥 스치고 지났을 다음과 같은 대목이다.
사내 폭력조차 성실과 품위유지 위반으로 문책하지 못하는 사측이 내놓은 이번 집단 징계회부 결정이 과연 올바른 것인지 스스로 반문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