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김장훈이 지난 20일 서울 마포구 홍대 인근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를 갖고 김현식 헌정앨범 발매를 앞둔 자신의 심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성호
- 11월 1일 고 김현식 헌정앨범 'Letter to 김현식'이 나옵니다. 올해는 김장훈씨 가수 데뷔한 지 20주년 되는 해이기도 한데요. 가수 김장훈에게 김현식은 무엇인가요.
"모두 10곡을 불렀어요. 1곡은 체코필 연주곡이고. 제게 김현식은, 피도 안 섞였지만 진짜 형 그 자체예요. 형이 없었다면, 물론 지금 어디선가 노래는 하고 있었겠지만, 현업가수는 안 됐을 거예요.
소설이라고 해도, 이건 너무 작위적인 거 아니야 할 정도로 우린 소설틱하게 꿰맞춘 것 같은 관계예요. 현식이형 어머니와 우리 엄마가 친구예요. 그러니까 자랄 때 제가 형네 어머니께 자연스레 이모라고 불렀죠. 또 저희 집 사업이 잘 안 돼서 어릴 때 형네 많이 놀러갔어요. 중학교 때 형을 보면 늘 기타를 치고 있었고 그 자체가 너무 신기했고 좋았어요.
길 떠나기 전날까지도 형을 보면 가슴이 막 뛰고, 설렜어요. 당대 김현식이 누구입니까. 요즘 애들도 알 정도니, 형은 정말 전설이지요. 전설 같은 존재가 내 형이라니, 그것도 가까이에 있는 친형 같은 존재라니, 제가 얼마나 좋았겠어요."
- 아주 근거리에서 김현식씨를 보고 자란 격이군요."마지막 5년을 투닥투닥 하면서 같이 보냈죠. 형이 90년 11월 1일 세상을 떠났는데 91년 11월 제 데뷔앨범이 나옵니다. 제가 경원대 88학번인데요. 4학년 때 밴드 만들어 공연을 했어요. 그때 누가 찾아왔다는 거예요. 서울음반에서 앨범 내자고. 너무 놀란 거예요. 이야~ 우리 밴드가 정말 잘 한다고 소문이 나서 서울음반 같은 큰 회사에서 찾아왔구나, 역시 대단해! 그런데, 그게 아니라, 서울음반 기획실장님이 당시 형이랑 음악 하던 베이시스트였던 거예요. 형이 사촌동생 같은 애가 있는데 노래 잘하니까 앨범 한 장 내보라고 귀띔한 게 생각나서 수소문해 찾아왔다는 거죠. 우리 녹음한 카세트 녹음테이프를 건네니까 자기들끼리 '꼭 살아온 것 같아, 음색이 너무 비슷해' 이러더라고요."
- 그래서 서울음반에서 앨범을 내신 거예요?"냈죠.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계약금 600만 원에 인세 20원. 하하. 그런데 이게, 그 시절엔 작은 돈이 아니었어요. 만일 형이 소개하지 않았다면 전 아마 오디션 안 봤을 거고, 그냥 그대로 나이 먹고 끝났을 거예요. 형의 연습실에서 노래연습 누구보다 집요하게 했고, 봄여름가을겨울 일할 때 구경하면서, 아 가수는 저런 삶이구나 했지요. 형은 제게 노래할 연습실도 줬고, 정신도 줬고, 노래할 계기까지 만들어준 분입니다."
- 데뷔 이후 뭔가 달라진 게 많았을 것 같아요."청운의 꿈을 안고 91년도에 앨범(늘 우리 사이엔)을 냈는데, 반응은 뭐 싸늘했죠. 그러면서 동시에 MBC 드라마 <우리들의 천국(1990~1994)>에 '내 사랑 내 곁에'가 나오면서 김현식 붐이 다시 일어나요. '내 사랑 내 곁에'가 공전의 히트를 칩니다. 그때 동아기획 사장님 말씀으로는, 모든 음반공장에서 김현식 앨범만 찍었다는 거예요. 다른 건 올 스톱이고. 단군 이래 최고의 히트였다고 했어요.
그런데 그는 가고 없으니, 그의 동생이라 일컬어지는 자가 음색이 비슷하다고 하니 김현식의 노래를 그에게 부르게 하자는 방송국의 제안이 있었지요. 딱 한번 형의 노래 '내 사랑 내 곁에'를 불렀어요.
그런데, 전 말이에요. 형의 죽음을 딛고 내가 일어선다는 게 무척 미안했어요. 싫고, 안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방송국에선 자꾸 제게 권했어요. 좋은 기회라고. 물론 김현식의 후광을 입었다면 단숨에 유명한 가수가 됐겠죠. 그러나 전 그게 싫었어요. 형 도움 없이 내 힘으로 일어서고 싶은 생각이 강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참 속이 좁았던 것 같은데, 그땐 그랬어요."
"생방송 펑크내고 완전히 '돌아이'로 찍혔죠"- 생방송 펑크를 내셨다고 들었어요."골든디스크 시상식을 하는데 방송국에서 '내 사랑 내 곁에'를 부르라는 거예요. 그 압박이 제겐 너무 심하게 느껴졌어요. 당시 PD들은 설마 신인인데 당연히 오겠지, 했지만 전 안 갔어요. 회사에서 잡아준 숙소를 나와 도로 경원대 영문과 과사무실로 갑니다. 생방송 펑크 내고 잠수 탄 거죠. 학교에선 후배들이 와 저 형 가수 됐다더니, 도로 학교 와서 애들 삥 뜯는구나 했고, 방송국에선 완전히 '돌아이'로 찍혔죠."
- 93년 두 번째 앨범을 내셨는데, 그때 반응은 어땠어요?"93년에 2집을 내고 대학로에서 공연을 계속 했어요. 2명, 10명. 관객 수가. 후훗. 기획자들이 보기에도 가능성은 있어 보이나, 계속 망하는 공연을 하니까, 이 사람이 하다 떨어져 나가고, 저 사람이 하다 또 떨어져나가고 그랬지요.
그러고 있을 때, 한편으론 방송국이 아주 야속하더라고요. 비겁하기 싫어서 그런 건대, 어느 정도 이성이 있는 PD라면 걔가 오죽해야 그랬을까 이해해줄 법도 한데 어쩌면 하나 같이 PD의 권위에 도전했다고 낙인 찍나 무척 섭섭했어요.
방송국 PD랑 멱살 잡고 싸움도 많이 했어요. '어디다 대고 반말이야?' 이런 거… 하하. 96년 3집 앨범 '노래만 불렀지'를 내고 언더라운드의 메카 동아기획을 찾아갑니다. 그때 들었던 얘기가 반드시 사람과 싸우지 말자, 꼬장 피우면 안 된다, TV 출연을 해야 한다 등이었어요. 그래서 나온 앨범이 98년 <나와 같다면> 4집입니다."
- 이게 대박 났잖아요."7년 만인 거죠. 7년간 배고픈 시절을 보내고, 김장훈 이름으로 뜬 거예요. 그땐 김현식의 도움을 받는 게 그렇게 싫었는데, 요즘은 김현식이라는 존재가 잊혀지는 게 너무 힘들어요. 형과 함께 보낸 말년이 너무 그리워요."
- 김현식씨가 눈을 감던 날, 많이 우셨겠어요?"아니오. 눈물이 안 났어요. 꿈같아서. 사람들은 막 우는데 저는 별 느낌 없이 그저 바라봤지요. 그런데 한참 뒤에야 형이 곁에 없다는 걸 깨닫곤 뒤늦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담배에 불을 붙이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져서 제 눈물에 제가 당황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도 형 노래를 듣다 주루룩 눈물이 흘러요."
소주, 바나나 그리고 개... 김현식이 좋아했던 것들- 생전에 김현식씨가 가장 좋아했던 건 뭐예요?"소주, 바나나. 아침에 딱 일어나면 냉장고에서 팩소주를 꺼내 꿀꺽꿀꺽 마셔요. 그리고 나서, 나가자! 해요. 따라 나가면, 편의점에 가서 또 팩소주와 바나나를 사요. 바나나 껍질을 쭉쭉 벗겨서 한 입 딱 베어 물고 저한테 쑥 내밀어요. 그리고 말하죠, 녹음실 가자. 그럼 따라가서 그거 먹고 그랬지요.
이번 앨범재킷도 그냥 형에게 붙이는 편지 콘셉트로 했어요. 앨범재킷에 형과 추억이 있는 사물을 찍어놓았는데, 우표, 소주, 담배, 하모니카, 청바지. 또 형이 좋아하는 게 강아지예요. 보는 것도 좋아하고 먹는 것도 무척 좋아했는데, 그래서 개를 찍을까, 전골냄비를 하나 찍을까 고민하다 그냥 소주잔을 넣었죠. 하하하.
한 가지 재밌는 게요. 형이 여자를 안 밝혔단 거예요. 제가 형과 거의 같이 다녔는데, 여자들은 형을 간절히 원했지만 형은 전혀 아니었어요. 전 지금도 그게 참 의외예요. 하하. 독특했지요. 아주 인간적이었고, 감성적, 감상적이었고. 어떤 아저씨 노숙하고 있으면 입고 있던 점퍼 확 벗어주고 들어오는 식이었으니까요."
- 잊혀지지 않는 일화도 있을 것 같아요."재밌는 거 있어요. 강아지를 되게 좋아했는데,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은 거예요. 갑자기 절더러 한강에 가자는 거예요. 얠 강가에 묻어주고 싶다는 거예요. 십자가를 딱 꽂아야 한다고. 그래서 그 죽은 개를 박스에 넣고 자전거에 실은 다음 한강으로 가려고 하는데, 아파트 경비원 아저씨가 어딜 가냐고 물었어요.
형이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어서 묻어주러 강가에 간다고 하니까, 그 아저씨가 아니 뭘 묻어 우리한테 주면 회식 잘 하지, 이 말 했다가 난리 났잖아요. 죽은 개 잡아먹는다고 욕하고 싸우고 난리 났었죠. 의협심이 굉장히 강했던 것 같아요. 후훗."
- 이번 헌정앨범은 김장훈씨에게 굉장히 의미 있는 작품 같아요."제 인생에서 특별한 무언가를 할 땐 꼭 체코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해보고 싶었어요. 체코와 뉴욕에서 작업하고 뮤직비디오 만들고, 앨범디자인 하는 것까지 해서 토탈 5억 원 들었어요. 많이 쓴 편이지요. 그렇지만 전 1만장도 기대 안 해요. 많이 안 팔릴 거예요. 디지털 음원? 이것도 아이돌시대에 뭐 쉽지 않지요. 이미 손익은 다 깨진 거 알아요.
그러나 그냥 이렇게 생각해요. 아주 오랜만에 제가 형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우표 값을 좀 많이 쓴 거라고. 배달이 수월치 않은 곳으로 부치는 편지니까 우표 값이 다른 데보다 좀 많이 드는 것일 뿐이라고. 후훗.
김현식은 대한민국의 전설이고, 제 형이고, 따라서 최대한 명반을 만들고 싶었어요. 요즘 마이크 좀 잡고 노래 좀 한다는 얘들에게도 김현식은 이미 전설이므로 그 만큼 예우하고 싶었어요. 후배로서 제대로. 또 하나, 올해 존 레논 형이 타개한 지 30년 되는 해예요. 김현식이 존 레논에게 밀려서야 되겠습니까."
"가수 안 됐으면 감옥에 몇 번은 갔을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