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시계는 제가 책임집니다"

[기사공모-스폰서] 술 친구가 된 제자들

등록 2010.05.14 10:18수정 2010.05.17 11:57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a

사제동행 이제는 술 친구가 되어버린 제자들과 함께 ⓒ 박병춘


아내 자랑, 자식 자랑하면 팔불출이라고 한다. 선생이 제자 자랑을 하면 뭐라고 할까? 그에 합당한 어떤 언어가 있더라도 즐겁게 감수하련다. '내 인생의 영원한 스폰서'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제자들이다.


22년 교직에 있으면서 참으로 다양한 제자들을 만났다. 열거할 수 없는 비밀도 많고, 말할 수 없는 고통도 뒤따랐다. 그런 비밀이나 고통 이면에 보람과 즐거움이 있으니 그것이 교직의 매력이리라.

고교 생활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나머지 인생이 결정된다고들 말한다. 날이 갈수록 입시경쟁은 치열하고, 학교는 학원화되어 간다. 그래서 지치는 아이들이 많다. 그들이 지칠 때 헤어날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가끔씩 그 선택은 가출로 이어진다.

가출 이후 돌아온 제자, 기적을 만들다

a

면담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을 하고 사는 게 행복이야." ⓒ 박병춘


10여 년 전 고3 담임을 할 때였다. L군은 함부로 드러낼 수 없는 가정환경과 입시 중압감에 시달리며 가출을 감행했다. L군의 장기 결석이 계속되었고, 나는 주변 친구들을 만나 다각도로 수소문했지만 오리무중이었다.

이후 L군은 수업일수 미달로 졸업을 포기해야 할 만큼 위험 수준에 도달했다. 담임으로서 애간장이 탔다. 나는 입수한 모든 정보를 총동원하여 L군을 찾아 밤이면 밤마다 대전 시내를 헤맸다. 하늘이 감동했을까? 심야에 대전 시내 한복판에서 L군을 만났다.


L군은 노래방 업주 밑에서 취객을 상대로 호객 행위를 하고 있었다. 밤거리에서 담임을 보자 서둘러 담배를 눌러 끈 L군은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L군을 붙들고 '학교로 돌아갈 것이냐, 가출해서 이렇게 살 것이냐' 합리적 선택을 하게 했다.

L군 자신도 심야 호객 생활이 힘들었을까? L군은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내 뜻에 따르겠노라며 오히려 내게 기회를 주었다. 나는 두말할 필요 없이 학교가 우선임을 내세웠다. 다양한 사례를 덧붙이며 밤샘 토의를 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한다는 말! 드디어 L군은 수긍했다.


a

같지만 다른 꽃, 아마도 교직은 저 꽃보다 다양하게 아이들을 키워내는 과정이 아닐까? ⓒ 박병춘


'사람 팔자 시간 문제'라고 했던가! 학교로 돌아온 L군은 환골탈태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언제 가출했느냐는 듯 대입 준비에 몰두했다. 그 결과 지역 최상위 대학, 원하는 학과에 진학했다.

졸업식날, 나는 L군에게 강짜를 부렸다. 강짜라기보다는 L군에 대한 믿음이기도 했다.

"대학 4년 동안 공인회계사 공부에 전념하거라.  공인회계사가 되지 않으면 나를 만날 생각을 하지 말아라."

세월이 흐르고 흐른 어느 날 L군에게서 전화가 왔다.

"선생님! 저 L입니다. 저 지금 고등학교에 올라 왔습니다.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아! 그래! 무슨 일이야?"
"헤헤, 뵙고 말씀드릴게요."

숫기가 부족했던 탓일까? L군은 교무실에 올라오지 않고 교정 한 켠에 차를 세워놓고 있었다.

"선생님! 오늘 공인회계사 합격자 발표 났습니다. 해냈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a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 박병춘


나는 L군을 꼭 안아주었다. 약속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귓속말을 했다. 내 눈물이 L군의 오른쪽 옷깃에 파고 들었다. L군은 현역 군복무도 마치고 복학하여 재학 4학년 때 그토록 원하던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한 것이었다.

연수를 마치고 취업한 L군이 첫 월급을 탔다며 연락이 왔다. L군은 시간에 얽매여 생활하는 내게 멋진 시계를 건넸다.

"앞으로 선생님 시계는 제가 책임집니다. 시계를 볼 때마다 저를 생각해 주십시오."

내 인생의 스폰서! 어디 L군뿐이겠는가. 이제는 술 친구가 되어버린 수많은 제자들이 있다. 토목이나 건축학과에 진학한 제자들은 퇴임 후 내 집을 지어준다고 한다. 자동차를 책임지겠다고 너스레를 떠는 제자도 많다.

지금까지 제자들이 결혼할 때 14차례 주례를 섰다. 주례를 설 때마다 느낀다. 내가 주례를 서는 게 아니라 신랑 신부가 나를 위해 축복해주는 것이라고. 신성한 교단에서 더 좋은 선생으로 거듭나라는 제자들의 선문답이라고 여긴다.

스승의 날이 다가온다. 이 날이 되면 잊지 않고 찾아오는 제자들이 있다. 정겨운 문자메시지가 액정을 장식한다. 교직 22년째! 그리운 제자들 기다리면서 열정과 사랑으로 교실에 들어가야 한다. 제자가 있어서 행복한 5월이다.

덧붙이는 글 | 내 인생의 스폰서 응모작.


덧붙이는 글 내 인생의 스폰서 응모작.
#사제동행 #내 인생의 스폰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AD

AD

AD

인기기사

  1. 1 '라면 한 봉지 10원'... 익산이 발칵 뒤집어졌다
  2. 2 "이러다간 몰살"... 낙동강 해평습지에서 벌어지는 기막힌 일
  3. 3 한밤중 시청역 참사 현장 찾은 김건희 여사에 쏟아진 비판, 왜?
  4. 4 "곧 결혼한다" 웃던 딸, 아버지는 예비사위와 장례를 준비한다
  5. 5 주민 몰래 세운 전봇대 100개, 한국전력 뒤늦은 사과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