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급신고대위 진급을 하면서 평생 직장으로의 꿈을 다시금 지피게 되었지만...
김동이
'대학졸업은 곧 실업자'라는 말이 돌 정도로 지금의 사회는 직장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라는 말로 비유될 정도로 힘들어졌다. 그러나 대학교 졸업하면서부터 이미 직업군인 이라는 직장(?)에 취업이 된 터라 취업 걱정은 하지 않았다.
드디어 1997년 7월 바라던 육군 장교로서의 첫 걸음을 시작했고 그렇게 직업군인의 길을 걸어온 지 4년. 2000년은 직업군인의 길을 가던 나에게 진급의 기쁨을 안겨주었다. 왕중위라는, 군 계급에는 존재하지도 않는 중위 계급 최고참으로서의 딱지를 떼는 순간이었다.
동기들에 비해 조금 늦긴 했지만 학수고대하던 대위 진급을 기쁨을 맛보았고 풋내기 장교라는 타이틀도 대위로 진급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수그러들었다. 직책도 바뀌었고 대우도 달라졌다. 계급이 오르면서 상급부대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자연스레 하급부대에 있던 고참들의 태도도, 대우도 달라졌다.
그동안 전방부대를 전전긍긍하면서 마음고생도 많아 잠시 평생 꿈으로 생각했던 직업군인의 길을 멈추려고도 생각했었지만 진급하는 순간 다시 평생 직업군인으로서의 각오를 다시금 새기는 계기도 되었다. 이제는 그야말로 핑크빛 미래만 가득하리라 생각했었는데.
하지만, 이 꿈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적인 일이 생각보다 너무 빨리 찾아왔다. 2002년 붉은 악마 티셔츠를 입고 머리띠를 두르고 목이 터져라 응원했던 월드컵의 열기가 채 가시기도 전인 그 해 11월 나의 정신적 지주이자 평생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리라 믿었던 어머니의 갑작스런 사고 소식과 죽음은 모든 의지를 꺾어버릴 정도로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충격으로 인해 더 이상의 직업군인의 꿈은 꺾이고 말았고, 꿈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군에 남아있으라는 주위의 권고를 마다하고 어머니의 죽음이 있은 2년 후 7년이라는 군생활을 마감했다. 서운함과 두려움을 마음속에 간직한 채로.
인생의 터닝 포인트결국 난 군에서 전역해 사회인으로서의 첫 발을 디디게 되었다. 하지만 7년이라는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의 군생활은 사회 초년생인 나에게는 너무 낯설고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바늘구멍같던 취업의 문턱을 넘기기에는 나이와 경력에서 경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느새 나이도 한참 큰 포부를 가질 20대를 군에서 보내고 30대가 돼서야 군에서 전역을 한 터라 그야말로 사회물정 모르고 어떻게든 되겠지하는 객기로 너무 성급하게 달려들다보니 탈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수십통의 이력서 작성과 면접, 그리고 미역국. 그렇게 전전긍긍하던 중 2006년 구원의 손길이 나락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계룡지역의 작은 인터넷 신문사에서 군 경력과 남다른 각오를 보고는 함께 일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온 것. 비록 급여는 군에서 받던 것에 비하면 박봉이었지만 지역에서 인정받는 언론사를 만들기 위해 발바닥에 땀나도록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다.
하지만, 작은 소도시이고 비판기사만 나가면 이를 해결하려는 노력보다 어떻게든 기사 확산을 막아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공무원들을 보면서 잠시 회의를 느끼기도 했지만, 그래도 지역주민들의 알권리와 기자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지역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더욱 적극적인 시정 감시와 견제에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