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 위험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31일 오후 서울 대학로에서 촛불문화제가 열리는 서울 시청 앞 광장까지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남소연
자유로운 무역(free trade)이 아니라 공정한 무역(fair trade)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듯이, 생활정치는 공동체의 중요한 결정에서 공정함과 정의로움을 요구한다. 그러려면 힘을 가진 자가 마음대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그 힘을 감시하고 제한할 뿐 아니라 작게 쪼개서 그것을 나와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내가 권력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부정적인 것이 아니고 내 삶을 구성하는 능동적인 요소이다.
따라서 생활정치는 주체적인 면에서 나의 경험과 의식이 정치의 주체로 '성장'하는 것을 뜻한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자연스레 시민이 되는 게 아니다. 좋은 정치의 주인이 되려면 전체 공동체의 일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정치인 페리클레스는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을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라 부르지 않고 아테네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 말했다. 내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만 공동체가 살아날 수 있다.
그러니 정치나 권력을 더러운 것이라 부르지 말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내가 그것을 쥐고 통제하려 노력해야 한다. 권력을 부정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그 힘의 근원을 깨닫지 못한다. 미국의 대통령 당선자 오바마에게 영향을 끼쳤던 미국 빈민운동의 선구자 알린스키는 자기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사람들이 힘을 가지려면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권력은 세상을 바꾸거나 혹은 변화에 저항하거나 간에 언제나 작동하고 있는 본질적인 생명력이기 때문에 권력에 대해 냉소하지 말아야 한다.
설사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 할지라도 내가 그 속에서 무언가를 했다면 그 실천은 소중한 것이다. 혼자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내가 움직이는 순간 그 움직임에 공감하는 다른 누군가가 내 옆자리를 채워줄 것이다. "군주는 갈아치울 수 있지만 평범한 백성들이야말로 영원히 갈아치울 수 없는 소중한 존재"라는 맹자(孟子)의 말처럼 우리가 바로 권력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진화하는 풀뿌리 민중 1919년 3월 1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민중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교과서는 마치 기미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민족대표 33인이 이 저항을 일으킨 양 묘사하지만 3·1운동은 민중의 거대한 꿈틀거림이었다. 자신이 자주민(自主民)임을 자각한 민중은 그 이후 60일 동안 1214회의 만세운동을 벌였다.
역사가 박은식에 따르면 숱한 탄압을 받으면서도 200여만 명이 참가했고 그중 7509명이 사망하고, 1만5850명이 다쳤으며, 4만5306명이 체포되었다고 한다(조선총독부는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하고 1만2000명이 체포되었다고 밝혔다). 독립선언서가 이 운동을 자극했을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물결을 움직인 힘은 민중의 밖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나왔다.
그래서 사상가 함석헌은 이 3·1운동 때부터 이 땅의 지식인들이 민중을 향해 겸손하게 얘기를 걸었고 민중을 주인으로 불렀다고 주장한다. 그 전의 역사가 정치가의 역사, 지배자의 역사, 영웅주의의 역사였다면, 3·1운동 이후는 씨알의 역사이고 자주하는 민(民)의 역사였다. 이런 민중의 힘을 깨달은 지식인들은 3·1운동이 일제의 탄압으로 잦아든 뒤 조직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같은 사회적 대안에 관한 논의가 활성화된 것도 바로 그 즈음이다. 3·1운동 이후 어떤 미래를 만들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약 90년이 지난 뒤에 일어난 2008년의 촛불집회 역시 자주하는 민의 역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집단지성, 다중지성, 떼지성, 그 무엇이라 부르든 다양한 공간에서 풀뿌리 민중은 자신이 어떤 사회에 살고 있는지를 조금씩 깨닫고 있다. 그리고 기존의 무능력한 정치체제가 희망일 수 없다는 점을 깨달으며 스스로 자기조직화를 시도하고 있다.
3·1운동이 민중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기존의 운동흐름을 바꿨듯이, 이런 자기의식화와 자기조직화는 그 뜻을 담을 '올바른 정치조직'을 요구한다. 새 술을 새 부대에 채워야 하듯, 생활정치는 그에 걸맞는 새로운 정치조직을 요구한다.
권위적이지 않고 수평적으로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며 결정하는 정치조직, 민중을 정치의 대상으로 소외시키지 않고 그들을 주체로 단련시키는 정치조직, 민중이 정치주체로 성장하도록 지원하는 정치조직이 그런 올바름을 뜻한다. 무엇보다도 그런 정치조직은 다음과 같은 노자(老子)의 뜻을 품을 것이다.
"민중에게 가서 민중에게 배우라. 민중과 함께 살고, 민중을 사랑하라. 민중이 알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고 민중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들어라. 그러나 최고의 지도자는 모든 일이 끝나고 모든 것이 이루어졌을 때, '우리 힘으로 이 일을 해냈다'고 민중 스스로 말하게 할 수 있는 자일지니."이런 올바른 뜻을 품는다면 정당이건 시민사회단체이건 그 조직은 풀뿌리 민중의 마음을 얻고 민중과 함께할 것이다. 반대로 이런 뜻을 깨닫지 못한다면 정당이건 시민사회단체이건 그 조직은 일시적으로 지지를 받을지 모르지만 곧 무너질 것이다. 그러니 새로운 정치조직이 과거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푸념하기 전에 그 뜻을 먼저 헤아려야 한다.
올바른 정치조직은 선거 때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과 결합되어 많은 정보를 제공하고 다양한 토론의 기회를 마련하며 풀뿌리 민중의 삶 속으로 스며들어야 한다. 그런 정치조직은 선거조차도 정당의 거수기가 아니라 자신의 정치적인 의견과 신념을 주장하고 나누는 축제의 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새로운 정치운동이나 조직은 이미 조금씩 구성되고 있다. 물론 지금 당장은 그런 꿈틀거림이 헛되고 불완전해 보인다. 하지만 조그만 싹이 혹독한 겨울을 견디고 봄에 그 잎을 틔우듯이 그 꿈틀거림은 변화의 물결을 일굴 것이다. 민중의 꿈틀거림이야말로 생(生)의 항의(抗議)이고, 삶의 외침이며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함석헌의 말처럼 꿈을 틔우는 봄이 곧 찾아오기 때문이다.
'풀뿌리가 정치를 흔든다'란 제목으로 <오마이뉴스>와 연중기획을 하고 있는 '좋은 정치 씨앗들'은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 풀뿌리에서 출발하는 새로운 정치적 흐름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가진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등이 참여하는 모임입니다. 현재 시민운동가인 하승창, 오관영, 오광진, 오성규, 이필구, 각 지역에서 시민운동을 해 온 고유기, 김승호, 김태근, 김현, 서진아, 송재봉, 이창림, 이해정, 이현민, 최혁진, 풀뿌리 지역정치인인 김혜련, 서형원, '좋은 정치'의 실현에 관심을 갖고 공부해 온 정규호, 하승우, 하승수 등이 참여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각 지역에서 일어나는 '좋은 정치'를 위한 움직임을 지원할 예정입니다. 이번 기획의 제1부는 여는 글로서 3차례에 걸쳐 생활정치, 즉 새로운 정치의 지평을 열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글을 게재할 예정입니다. 제2부는 '풀뿌리부터 썩는다' 제하의 보도를 통해 지역정치가 왜곡되는 현장을 고발합니다. 마지막 제3부는 '좋은정치'에 대한 국내외 사례를 제시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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