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월드컵
김솔지
그때 월드컵이 열렸다. 98년 프랑스월드컵. 한국은 대회마다 단골로 나오는 멕시코에 1대 3으로 꺾였고 네덜란드에는 0대 5라는 기가 막힌 굴욕을 겪었다. 벨기에는 동점 취미가 붙었는지 네덜란드, 멕시코와 연이어 무승부하더니 한국과도 무승부로 경기를 끝내게 되었다.
외국에 홀로 있다 보면 누구나 애국자가 된다고 했던가. 안타까움과 창피한 생각이 어우러져 '차라리 나오지 말지 이게 뭐야'라면서 연신 혼자 투덜거리고 있었다.
학교를 가니 여기저기서 월드컵 이야기로 시끌벅적했다. 복도에서 영국인 교수님이랑 그 주위를 둘러싼 학생들이 이야기하는데 어떤 학생이 "그런데 한국이 어디 있는 거야?"라고 물었다. 내 앞에 있던 스웨덴 학생이 "그 말레이시아랑 인도네시아 중간에 있는 나라잖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지금도 후회되지만 발끈하여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아니! 그게 아니고 중국과 일본 사이에 있다"였다. 세상에! 이건 낚인 기분이었다. 대한민국을 대한민국이라 부르지 못하는 마음이 홍길동의 호형호제를 못하는 쓰린 마음과 같았을까? 고작 하는 나의 설명이란 게….
그때 모두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 네가 한국인이지? 그래 한국 잘했어. 노력했으나 멕시코가 워낙 잘하는 나라고 네덜란드가 워낙 축구 강국이다." 뭔가 억하심정에 가득 찬 나의 기운을 느꼈는지 옆의 일본친구가 어깨를 토닥이며 "너네는 그래도 한 번은 무승부잖아? 우리는 세 번 다 졌어"라고 말한다.
'볼보'와 '아바'의 나라 스웨덴, 축구강국 산업혁명의 근원지 영국, 거기에 축구에서는 별볼 일 없어도 기술과 선진국 대열에서는 경쟁력을 가진 일본. 세계인의 사랑을 흠뻑 받은 영국가수 존 레논의 부인 요코조차 일본인이잖아?
매일 빌붙어먹는 브라질 친구조차도 이번 기회에 월드컵에서는 조 1위로 아주 기세등등하다. 내가 설 곳은 어디인가? 다문화가 어우러진 런던 작은 건물에서는 인간 하나하나가 그 나라의 대변인이 되어 힘겨루기라도 하는 듯한 영상이 펼쳐졌다.
60여 명 넘는 학생 앞에서 '재벌'로 망신당한 기분이란...지금은 우스갯소리로 이야기하지만 내가 수업시간 중 자발적인 발표를 한 것은 딱 한 번이었다. 우리 학급 내 최고 실력을 뽐낸 그 발표는 '개발'에 대한 수업에서 교수님이 "한국 말 할 줄 아는 사람?" 이렇게 물어보았을 때다.
이 말에 단연 학급내 혈혈단신 한국인이던 나는 손을 들었고 무얼 시키려고 이러지, 라는 기분이 들었다.
"이것 좀 읽어 봐. Chaebol."
별다른 생각없이 우뚝 일어선 나는 당당하게 "재벌" 이랬고 "채벌?" "채볼?" 이런 소리로 장내가 어수선했다. 그래서 나는 똑똑히 "재벌!" 이렇게 친절하게 발음 교정까지 해주었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이어진 강의는 브라질과 대한민국을 개발도상국으로서 비교하는 사례였는데, 대한민국은 재벌의 정치적 유착관계와 독점체제 때문에 단기간의 성공은 이뤘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해가 된다고 했다. 덧붙여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용어는 한국에서 대표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한국어를 고유명사(Chaebol)로 채택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정신적 공개 처형이란 게 이런 것일까. 자부심 강한 영국교수와 별 생각이 없는 학급친구들은 이러한 말들이 나에게 상처가 되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그냥 객관적인 학습내용이고 이해를 돕기 위해서 그런 것인데 '니가 오바하는 것이다'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나는 아주 외딴 타지에서 파란눈 까만눈 곱슬머리 노랑머리 갈색머리 60여 명이 넘게 나를 주시하고 있을 때 내 조국의 치부 두 글자를 자랑스럽게 외쳐댔고 잘못 알아듣는 이의 이해를 친.절.하.게 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