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문 선생
이정환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본 양화점을 정리하러 갔던 아버지의 귀국길은 전쟁통에 막혀버렸다. 당장 가장으로서의 책임이 선생에게 돌아왔다.
장남인 '형'의 학업까지 포기하게 할 순 없었고, 외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두 동생 때문이라도 생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신문팔이, 구두닦이, 뽑기 등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라고 했다. 한 번은 문구점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는데, 그 때를 선생은 이렇게 회상했다.
"1년에 딱 이틀, 추석과 설날만 놀았어요. 그런데 주인은 더 하니, 원… 그 양반은 노는 날이 아예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노동 강도지만 그땐 그랬습니다. 아침 9시에 출근해서 통금까지 근무했다니까. 그리고 집에 돌아와 매일 새벽 2시까지 만화를 그렸어요. 완전히 만화에 미쳤었지." '이정문표 심술' 태생은 '약한 자에게 강한 사회'글을 깨치면서부터 좋아했던 만화였다. 막연했던 만화가의 꿈은 팍팍한 생활 속에서 오히려 또렷해졌다. "밤마다 미친 듯이 습작"을 거듭했고, 자신의 '분신'을 정교하게 다듬었다. 그리고 1959년 3대 대중잡지 중 하나였던 <아리랑> 신인만화가 공모에 당당히 입선한다. 그때 나이 겨우 열 여덟 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심술가족 최초 캐릭터 '심술첨지'는 그렇게 탄생했다.
- 왜 하필 심술이었습니까."그 때 구두닦이… 누가 사람 취급해 줍니까. 사회 가장 밑바닥 신세잖아요. 온갖 수모를 당했어요. 그럼 당한 사람 '욱'하게 마련이잖아요. 놀부가 떠오르더라고. 그런 캐릭터를 하나 만들어서 심술이라도 부렸으면 좋겠다, 차라리 내가 당했던 걸 만화로 표현하는 것이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심술을 제대로 부린다"는 것을 알기 어린 나이에, 선생은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 버렸는지 몰랐다. 비교적 유복한 형편에서 바닥까지 추락했기에, 약한 자들의 설움이 더욱 뼛속 깊이 새겨졌을 수 있다.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강한 자'들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응징할 수 있는 방법이 소년에게는 만화밖에 없었다. '강한 자에게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사회', '이정문표 심술'의 태생이었다.
이순자씨의 '턱', 심술턱이 심술통 된 사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