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관령 옛길 표지석대관령 중턱에 표지석이 서 있다. '반정'이라하여 길의 중간지점을 뜻한다.
최백순
대관령 옛길에는 재미난 지명도 있다. 대관령이 험한 까닭에 이 길을 오가던 관원들이 넘어지며 구르며 내려왔다 하여 '대굴령'이라고도 하고 굴면이, 원읍현이라는 말이 생겼다. 답설군, 가마군의 전설과 풍습도 전해진다. 원읍현은 원님이 울고가는 고개라는 뜻으로 원울이재라고도 불린다. 대관령의 옛길로 윗굴면이에서 더 올라가면 나타나는 작은 재다.
홍길동전을 쓴 허균은 이 원읍현의 유래를 이렇게 적고 있다.
"강릉은 영해의 동녘에 있는 큰 도회지다. 신라때는 북빈경이었으며, 동경이라고도 불렀다. 김주원 공이 봉을 받은 이래 꾸민 장식과 사치한 의관이 화려하고 특출하여 서울과 서로 비슷하였으며, 또한 풍속이 문교를 숭상하여 의관과 문필을 갖춘 선비로서 사장에 몰려드는 자들이 줄을 이어 늘어설 지경이었다.
풍속이 돈후하여 노인을 공경하고 검소함을 숭상하며, 백성들은 소박하고 성실하여 기교가 없었다. 어업과 쌀의 생산이 풍요로워 비단 산천의 아름다움이 동방에서 으뜸일 뿐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지방에 관리된 자들은 대개 여기를 못잊어하여, 떠날 때 눈물을 흘리는 자가 있었으므로 원읍현이 생겨 지금도 있으니 대개 그 증거가 될 만하다." (허균, <성소부부고>)대관령 고개를 넘어올 때는 좋은 벼슬자리 두고 이 험한 고개를 넘어 조그마한 곳에 벼슬살이 가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지만,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는 떠나기를 아쉬워하며 울었다는 데서 유래한다.
또 대관령에 많은 눈이 와서 사람들이 다닐 수 없더라도 나라의 진상품을 나르거나 관원행차로 부득이 대관령 눈길을 넘어야 했을 때 앞에 서서 눈을 밟아 주던 답설대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제설차량들이 그 일을 대신하지만 당시에는 허리까지 쌓인 눈을 앞장서서 헤쳐야 했던 백성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최근에 새로 뚫린 도로가 나기 전에는 기후변화가 심하고 안개가 짙게 끼며 잦은 폭설로 길이 두절되기도 했다. 피서철에는 차량들로 꽉 막혀 버리곤 했던 대관령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쉽게 넘을 수 없는 험준한 고개임에 틀림없다.
대관령 중턱에는 19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주막이 있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친구들과 어울려 이 길을 나는 듯 뛰어 다닐 때 허름한 주막에는 나이 드신 할머니가 솔잎을 넣어 만든 막걸리를 팔고 있었다. 어린 나이지만 막걸리 정도는 마셔도 흉이 안됐다.
그리고 그 주막을 만든 이병화에 대한 기록이 어흘리 대관령 중허리 8Km 반정 아래 약 300m 지점 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비문을 해석해 보면 "기관 이병화가 끼친 은혜를 잊지 못해 세운 비석. 100꿰미(대략 1000냥, 벼 500석 정도)의 돈으로 밑천을 삼아 이자를 늘려 이곳에 점막을 열었다. 이런 사유로 생활하든가 농사짓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쉴 수 있고, 거주하는 사람을 위한 오두막집이 마련되었다. 이를 작은 돌에 새겨서 영원히 영예로움을 기린다"는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