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목리 포구 제주도 전통배 '테우'를 만드는 노인을 지나 얕은 돌담길을 걷다보면 닿을 듯 가까이 서 있는 섶섬을 만날 수 있는 보목리 포구가 나온다.
대한항공 제주 강영진
제주올레꾼들이 묵을 숙소는 서귀포에 위치한 풍림콘도였다. 제주 유일의 담수하천인 강정천과 서귀포 앞바다가 만나는 데 있어 여느 호텔 부럽지 않은 정원과 전망을 갖춘 곳이다. 하룻밤의 짧은 휴식 시간에도 풍경을 제일 먼저 고려한 주최 측의 배려가 숙소에서도 느껴졌다.
아기가 단잠에 빠져 있는 아침 일찍, 방을 같이 쓴 언니들과 함께 콘도 정원을 산책하기로 했다. 혹시 깨어나서 울면 어떡하나 잠시 망설이고 있는데, 막내 하얀씨가 아기 지킴이를 자청했다. 하얀씨가 아기를 봐주는 동안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언니들은 룰루랄라 몽돌몽돌한 바닷가 산책로를 맨발로 접수하러 나섰다.
정돈된 잔디와 야자수, 넓직한 수영장을 지나 바다로 이어진 좁은 길은 꽤 운치있었다. 달빛이 밝은 가을 밤에 연인들이 어깨를 붙이고 지나가면 딱 맞을 정도의 오솔길은 솔향기가 진하게 배어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언덕 길을 내려가면 왼쪽은 하천, 오른쪽은 바다를 두고 서니 바다를 향해 달려가는 담수와 육지를 향해 제 몸을 부수며 달려드는 파도가 만나는 지점이다. 서로를 밀고 당기며 바다와 냇물이 일렁이는 물의 경계를 만들고 있었다.
간밤에 맥주 한 캔과 양초를 들고 검은 바위에 걸터앉아 밤바다를 구경한 흔적이 선명했다. 타다 남은 양초 세 자루가 종이컵을 촛대로 의지해 서 있고, 깡통 입구에 붙은 말라버린 맥주거품이 한밤중의 수다를 짐작하게 한다. 해가 막 떠올라 검은 돌들을 비추는 바닷가에서 조용조용 자기 얘기들을 풀어놓았다. 중학생 아들을 둔 주부 정화언니는 10월 28일에 춘천에 간다고 했다. 그날은 의암호반에서 조선일보 마라톤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내가 38km 지점(우리 집 앞)에 서서 박수로 응원하겠다고 하자, 거기까지 달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첫번째 풀코스 출전이라고 한다. (28일, 약속대로 소양강 처녀 동상 근처에서 우리는 반갑게 포옹했다. 한 사람은 달리고, 한 사람은 풍선을 들고 박수를 쳤다.)
철인 3종 경기를 취미로 하는 정화언니와 함께 화려한 싱글 오남언니와의 수다도 이어졌다. 서른의 강을 건너는 여자들 셋이 시원한 아침 바닷바람을 맞으며 두런두런 사는 이야기를 나눴다. 여행을 좋아하는 언니들의 말은 대여섯 살 어린 나에게 따뜻한 응원가가 되어 주었다. 남편 없이 혼자 떠나온 여행길이었기에 가족이 아닌 다른 이들과의 만남이 가능했다.
이번 여행에서 쿠하에게 친언니 이상으로 잘해 준 승주와 지민이는 쉬는 시간에도 쿠하를 챙겨주었다. 나와 동갑인 승주엄마 차은정씨와는 생각도 말도 잘 통해 금세 친구가 됐다. 길가에 앉아 다리를 두드리며 아이들 이야기, 우리들 이야기로 발은 쉬어도 입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당시엔 몰랐는데 승주가 쿠하에게 제 음료수를 나눠 먹이고 있다. 한번도 먹어본 적 없는 희한한 음료수 병을 승주언니가 거꾸로 들어 먹기 편하게 해주는 모습이 참 예쁘다. 카메라가 수다쟁이 엄마들보다 언니동생 사이가 된 우리 아이들을 향했어야 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