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우리집 마당 풍경송성영
유기농산물 생산자인 나의 가장 큰 숙제 '유기농산물은 가난한 사람들은 먹지 못하고 가진 사람들만을 위한 전유물이다'는 여전히 남아 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가들에게 유기농산물을 비싸게 팔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아주 값싸게 제공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현실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이것은 혜택 받는 사람들의 한계가 분명하고 또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유기농 생산자들 대부분이 가난한 사람들을 돌볼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 못하고 특히 나 같은 소작농들에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가진 사람들을 먹여 살리는 꼴'이라 하여 유기농을 멈춰야 하는가? 자연 환경을 살리는 데 만족해야만 하는 것일까? 자연 환경을 살리고 '가진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다 같이 유기농산물을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유기농산물을 접하지 못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기농을 재배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고 또한 그 생산물들을 가진 사람들이 좀 더 높은 가격으로 소비해 줄 수 있는 순환 고리가 성립될 수만 있다면 문제는 간단하게 해결된다. 그렇게 상생의 원리로 유기농 소농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자연 환경은 물론이고 농촌 경제마저 살아날 것이다. 일석이조다.
하지만 어떤 정부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유기농을 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줄 수 있으며 또 누가 그 힘든 소작농이 되겠다고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들어 올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한 누가 그 유기농 소작농들을 먹여 살릴 만큼 비싼 가격으로 유기농산물을 구입해 먹을 수 있겠는가?
유기농업으로 가난하게 살지만...
며칠 전, 올 들어 세번째로 채소 배달을 다녀왔다. 그 중 한 집에서 차를 마시며 자연과 사람의 순환 고리에 관해 많은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대화 도중에 나는 문득 "유기농이 결국은 자본가를 먹여 살리게 될 것"이라고 했던 사람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떠올랐다.
"유기농을 통해 단지 자본을 만나는 것이 아니다. 자연을 만나고 사람을 만난다.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진정한 유기농이 아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그 집에서 우리 집 아이들이 입을 옷 보따리를 챙겨 주었다.
"헌옷을 줘서 미안하네요."
"무슨 말씀을요, 그렇잖아도 녀석들 몸집이 커져서 옷이 필요했는디, 무작이 고맙쥬."
집에 돌아와 옷 보따리를 펼쳐 놓았다. 아내는 물론이고 아이들도 무척 좋아했다.
"우와! 이게 꿈이냐 생시야! 낼모레 수학여행 가는디, 어떤 걸 입구 갈까?"
녀석들은 이 옷 저 옷 입어가며 한바탕 패션쇼를 벌였다. 가난을 즐겁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이 고마웠다. 가난한 애비를 둔 아이들의 환한 얼굴에서 유기농이 그저 농약이나 화학비료 따위를 주지 않는 먹을거리만을 생산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어제는
징그럽게 풀을 뽑았다.
오늘은
채소밭에 깔아 놓고 보니
열댓 마리 늘어난
닭 줄 풀도 없다.
그저
열댓 마리의 벌레 잡아
닭장으로 들어서는
발걸음이 아쉽다.
내일은
계분을 모아
채소와 풀이 자라는
밭에 돌려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