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환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사망. 15일 부검. 그리고 곧바로 다음날 화장.
이를 보더라도 당시 상황이 얼마나 숨가쁘게 돌아갔는지 알 수 있다. 만약 15일에 부검이 이뤄지지 않았다면, 타살이 입증되지 않았다면, 박종철 사건은 아직 '의문사'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최환 변호사의 역할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먼저 경찰의 변사 처리 신청을 거부했다.
1월 14일 저녁 7시 40분경, 경찰관 2명이 최환 당시 공안부장을 찾아왔다. 그들의 손에는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문제의 변사보고서가 들려 있었다. 박종철의 집으로 출동한 동료들이 합의서에 도장을 받아오면, 곧바로 시신을 화장하여 사건을 종결할 참이었다. 하지만 묘한 운명의 힘이 작용한다.
"그들이 만약 오후 5시에 왔으면 형사부로 갔을 겁니다. 7시까지만 왔어도 당직검사가 맡았겠죠. 그런데 형사부 검사 다 퇴근하고, 당직검사가 잠깐 자리 비운 사이에 찾아온 겁니다. 딱 저만 있었던 거죠. 자기들이야 눈이 번쩍 뜨인 거지. 공안부장이니까.
지방에서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서울대까지 보냈으면 얼마나 애지중지하는 아들이겠어요. 그런데 어느 부모가 쇼크로 죽었다는 아들 바로 화장해서 유골 내준다는데 동의하겠어요. '아들 얼굴 한 번 봅시다'하고 따라 올라오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이건 거짓말이다, 진실이 아니다. 내일 정식으로 처리하자'고 그랬더니 생난리를 치는 거요. 공안부장이 우릴 안 도와주면, 누굴 믿고 수사하느냐고!"
사방에서 전화가 걸려오기 시작했다. 치안본부·중앙정보부·청와대 고위층 등에서 '사인해주라'는 압박이 쏟아졌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휴대폰이 없을 때였다는 것. 전화 코드를 뽑고 최 부장은 퇴근해버렸다. 그리고 다음날, 검사장과 의논 끝에 사망원인을 밝혀내기 위한 수사팀이 구성됐다. 최 부장 휘하에 안상수 검사가 배속된 것도 그때였다.
"안 검사를 불러 얘기했죠. 보통 사건이 아니다, 적당히 넘어갈 사안이 아니라고. 안 검사가 그래요. '부장님 걱정 마십시오.' 법원에서 사체 압수수색영장을 받아 시신을 인수하라고 지시했는데, 오후 늦도록 소식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연락했더니 '시체를 안 내줍니다' 그러더군요. 그래 경찰에 전화를 걸어 따졌죠. 영장이 나왔는데도 시체를 왜 안 내놓느냐. 부검을 못하게 하면 공무집행방해다 말이지.
조금 있다 전화가 와서 또 그래요. 그럼 경찰병원에서 부검하도록 해 달라. '누구 얘기냐' 그랬더니 자기네 제일 윗사람 얘기래요. '생각해봐라. 경찰 손에 죽은 사람을 경찰병원에서 해부하면 누가 결과를 믿겠느냐. 언론도 안 믿고, 국민도 안 믿는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느냐'. 그래서 한양대 병원에서 부검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경찰은 집요했다. 집도의 만큼은 경찰병원 의사와 국과수 과학자가 하게 해달라고 또 졸랐다. 그들의 요구를 일단 받아들인 최 부장, 곧바로 한양대학교 병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부검의를 한 명 붙여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 그래서 합류한 의사가 한양대 박동호 교수였다. 한숨 돌린 최 부장은 안상수 검사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고 한다.
"유족대표, 학생대표 등 그 사람들 전부 하나씩 (부검 현장에) 넣어줘라. 공개리에 부검하는 것으로 해라. 또 나중을 위해 특이 소견이 나올 때마다 메모해라. 그리고 다 끝난 다음에 의사 셋에게 보여주고 사인을 받아라. 진실을 확고하게 지켜주는 요인이다. 그거 안 하면 나중에 다 말들이 바뀐다."
그를 박종철과 만나게 한 묘한 운명
최 부장의 예상은 적중했다. 부검 현장에 있던 경찰병원과 국과수 의사들이 엄청나게 시달린 끝에 결국 굴복한 결과라는 것이다. 다음날 치안본부장이 기자회견에서 '역시 쇼크사로 드러났다'고 발표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는 주장이다. 반면 검찰 기자회견은 '물고문 치사'.
극명하게 엇갈린 결과에 기자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당연히 의혹은 커져만 갔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역사의 전면에 떠오르게 된다. 하지만 수사는 이상하게 돌아갔다.
"철저한 수사를 주장했어요. 그리고 당연히 나한테 (수사가) 돌아올 줄 알았죠. 헌데 결과를 보니까, 담당 검사는 안상수로 하되, 초벌 수사를 경찰에서 하기로 했다는 겁니다. 그걸 누가 믿겠어요? 안 그래요? '지금까지 우리가 다 해 놓고 왜 안 하냐'고 항의했지만, 공안 일이나 하라는 대답이 돌아오더군요. "
- 수사를 맡지 못한 아쉬움이 컸던 것 같네요.
"수사에 손을 대지 못한 점이 불만스러워 이런 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만 해도 검찰은 소신을 굽히지 않았잖아요. 물고문에 의한 타살이란 점을 밝혀냈잖아요. 그랬으면 수사도 같은 궤도에서 진행돼야지, 왜 옆길로 탈선하냐구요. 제대로 했으면 검찰 명예가 실추되는 일은 안 생겼을 것 아닙니까. '대한민국 검찰은 살아있구나' 이랬을 거 아뇨.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독재정권의 앞잡이란 인식이 생겼죠. 결국은 권력에 약하고 나중에 가서는 재벌에 약하고 또 나중에는 (검찰)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이 정치권에 잘 보여 개인 영달이나 취하려 하고…. 결국 이 때부터 뭐랄까, 우리 검찰의 원죄가 생겨버린 거죠."
검찰의 '탈선'은 언뜻 진실을 덮는 듯 했다. 하지만 결코 오래 가지 않았다. 박종철 사건의 진실은 이부영에게서 한재동 교도관으로, 그리고 다시 '비둘기'(비밀 편지를 뜻하는 은어)가 김정남의 손에 안착하면서 1987년 5월에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검찰의 '원죄'가 '낙인'처럼 세상에 각인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최 부장 역시 '고약한 놈'으로 찍힌 결과를 감수했다고 한다. 속된 말로 "밀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때의 탈선, 검찰의 원죄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