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은행 측면. 내부 홀은 중앙에 1-2층이 터져 있다. 왜 정비석의 자유부인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이덕은
철도원이 매달려 좁은 골목길을 통과하는 기관차 사진. 이 사진을 찍은 현장이 군산 세풍제지선(製紙線)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군산에 한 번 가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또 <우리 도시는 식민지의 기억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라는 안창모 교수의 글을 접하고는 거의 흥분 상태에 빠져 버렸다. 일제하 건축물에 대한 철거 찬반을 떠나 일제흔적이 남아 있는 건축물을 제한된 공간에서 이렇게 많이 만날 수 있다니….
서해안 고속도로로 빠져나간 고속버스는 예상 밖으로 빨리 달린다. 동군산 IC를 빠져 나가 군산 외곽으로 들어 가는 버스가 멈추는 순간, 세풍제지선으로 그 유명한 기차가 지나간다. 공휴일에는 다니지도 않고 평일도 하루에 한 번 정도라는데…. 셔터기회를 놓친 실망감이 이만저만 아니다.
횡단보도 신호불빛 마저 얼어 붙게 만든 꽃샘추위와 바람 때문에 고르고 뭐고 할 것 없이 길 건너편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식당으로 들어 가니, 아줌마 셋이 밥을 먹고 있다가 반갑게 맞아준다. 홍어탕, 조기탕, 대합탕, 해장국, 뭐, 뭐, 뭐, 백반. 그래 "아줌마 여기 백반 둘!"
펄펄 뚝배기에 끓여 나오는 미역국과 튀긴 덕대(서대)가 몸를 녹여준다. 갑자기 어디서 기관차 디젤엔진 소리가 '붕붕붕붕' 들린다. '아뿔사' 아까 세풍제지로 들어 갔던 기차가 다시 돌아 나오고 있다.
명장면 재현은 못하더라도 기관차 사진 하나는 건져가야 하지 않는가? 숟가락을 던지고 허겁지겁 카메라를 들고 뛰어 나갔으나 화물열차는 반대편 골목으로 꼬리를 감추려는 참이다.
인터넷에서 내려 받아 조각조각 연결한 지도를 들고 조선은행을 찾는다. 빨간 벽돌 이층집에 세로로 긴 창문은 위쪽과 아래 창문을 하얀 화강석을 연결하여 권위를 강조했다. 그 위에 물매(경사)가 가파른 동판 지붕을 대어 놓은 것으로도 부족하여 지붕 허리쯤을 가로로 띠처럼 돌아 천창을 두어 화려함을 더했다.
나이트클럽으로 쓰였다는 조선은행 건물 홀에는 파벽돌과 나무조각, 조명파편, 부서진 의자로 폐허에 가까웠는데 거기에서 정비석의 <자유부인>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눈을 가느다랗게 뜨고 폐허 속에서 그 옛날을 상상해보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다.
'…며칠 전에도 와 보았던 은행이지만 초가집의 다섯 배도 훨씬 넘는 높이의 붉은 건물이 주는 위압감은 경찰서 못지 않다. 반짝반짝 빛나는 노랗고 커다란 신주 손잡이를 밀고 들어 서니 쇠창살 창구 너머로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일하고 있다.
커다란 금고문 앞에 자리잡고 까만 안경테에 잘 다듬어진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파이프를 물고 있는 야마모토가 먼저 눈에 뜨인다. 힐끗 나를 쳐다보던 야마모토는 파이프를 물고 거드름을 피우며 다가온다. 천장에서 내려오는 햇살을 타고 올라가는 담배연기에서 나는 오늘도 절망감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