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술국치를 당하자 자결로써 '군자지도'를 실천한 매천 황현을 기려 자택 터에 세운 매천사(전남 구례군 광의면 서월리)경술국치를 당하자 자결로써 '군자지도'를 실천한 매천 황현을 기려 자택 터에 세운 매천사(전남 구례군 광의면 서월리)
이철영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한 해 전인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12월 20일 이재명이 이완용을 습격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합병 소식이 알려지면서 9월 초 박병하가 단식하다가 순국하고, 매천 황현이 자결한 데 이어 의병장 이근주의 자결, 예안 의병장을 지낸 향산 이만도의 순국, 유림의 삼종질인 전 사간원 지평 이중언의 단식 순국 등이 잇따랐다. 그의 혈서는 이같은 분위기에서 향한 의협심의 발로였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17세의 나이로 혈서를 쓴 이래 3.1운동 직후인 19년 봄 고향을 떠나 멀리 만주로 망명하기까지 유림은 인근 안동·대구지역에서 청년들을 규합, 일종의 비밀결사들을 통해 국권회복에의 의지를 나름대로 불태웠다.
안동에서는 정진택을 비롯한 청년들과 더불어 부흥회를 결성하였고, 대구에서는 김용하 등과 더불어 자강회의 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런 과정에서 한때 유림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시달림을 당하기도 했다. 그가 22세 되던 해인 1915년의 일이다.(피체 당시 그가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갇혀 있었는 지는 분명치 않다.) (주석 3)
젊은 시절 유림의 이같은 활동은 평생 동안 일제와 싸우는 항일전사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묘목 때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거니와, 그는 소년기부터 국권회복에 뜻을 두었고, 한눈 팔지 않고 평생 이 길을 걸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한 문인은 <추모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앞 부분이다.
혁명아는 하늘이 내는
섭리 이거니
십칠 세 혈서 넉자
충군애국(忠君愛國)
약관에 형극의 길 면류관
으로 여기고
중원의 넓은 땅을 한 조각
구름되어
간곳 마다 자유 평등 평화
외로움은 조국과 민족
눈물로 달래고
황하진서 만리길
한발 한발 중경가는 길
한민족 한정부 한이념
구호로 삼아…… (주석 4)
주석
1> 김재명, 앞의 책,
2> 앞의 책.
3> 앞의 책.
4> 황빈, <추도시>, <단주 유림 자료집(1)>, 24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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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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