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가가난이 물씬 풍기는 정진동 생가
청주도시산업선교회
고된 노동에 지친 아버지가 안 됐다는 생각은 잠시. 정진동은 '이때다'라며 환호작약했다. 나르던 장작을 갈무리하고 교회로 횅하니 달려갔다. 예배당 문을 열자 제일 먼저 어머니와 여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1시간의 예배는 순식간에 지나갔다.
예배 시간 내내 밝아졌던 얼굴이 교회 문을 나서자 흑빛이 됐다. 어머니가 앞장서고 정진동과 여동생들이 그 뒤를 이었다. 집에서 나올 때 남편이 졸고 있었다는 아들의 말에 작으나마 안심을 했던 임순예는 조심해서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하지만 문은 꿈쩍하지 않았다. 안에서 잠근 것이다.
"여보. 문 좀 열어 주세요" "..." 묵묵부답이었다. 두세 번 반복한 후 임순예는 이내 포기했다. 남편의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엌으로 갔다. 아궁이 앞에서 두 딸을 껴안았다. 어머니와 여동생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정진동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렇다고 아버지에게 항의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아궁이 앞이라지만 초겨울 매서운 날씨에 밤을 지새는 일은 끔찍한 일이었다. 정진동이 어머니와 여동생과 함께 부엌 아궁이 앞에서 밤을 지샌 것은 1940년대 초반이었다.
1988년 청주 택시 파업 때 노동자들의 희망으로 떠올랐던 정진동 목사는 왜 어린 시절 교회를 마음 편히 못 갔을까? 아버지 정영모가 특별히 보수적이어서 그랬을까? 그렇지는 않다. 정영모는 당시 보통의 조선사람이었다. 그냥 조상들 잘 모시고 가족끼리 사랑하며 지내길 바랬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아내와 자식들이 교회를 나가자 자신의 뿌리가 흔들리는 듯했다.
머슴 생활을 하다가 나이 34세가 돼 결혼한 그가 아들 정진동의 우렁찬 울음소리를 들은 것은 1933년 12월 26일. 하늘을 날 것 같은 기쁨은 아기가 고추를 달았기 때문이다. 동래 정씨 31대손인 6대 독자(獨子)의 탄생이었다.
그제야 조상들에게 면목이 섰다. 자신의 제사를 지내 줄 자식이 생겼다는 기쁨도 함께였다. 그런데 그런 귀한 자식이 교회를 나가니, 제삿밥 얻어먹기는 애초에 글렀다고 생각하니 열불이 났다.
머슴
6대 독자 정진동이 어린 시절 찬밥 신세였던 것은 단순히 교회를 나가서만이 아니었다. 집에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오랜 기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한 정영모 집에서는 아침 식사 후에는 점심 겸 저녁을 죽으로 연명해야 했다. 아사 직전의 가난 상태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기, 1950년대까지 이어졌다.
그런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정진동의 삶은 허기진 생활의 연속이었다. 당시 정진동의 봄 아침 일과를 살펴보자. 해뜨기 전 이른 아침에 두엄(거름) 두 짐을 지고 논에 펴야만 했다. 두엄이 없으면 마을을 다니며 개똥 한 망태기를 주워 와야 했다. 이러지 않고서는 그날 아침을 먹을 수 없었다. 아침을 먹은 후에는 풀을 베어 퇴비장에 차곡차곡 쌓았다.
농사는 1년 내내 쉴 틈이 없었다. 모내기부터 논매기, 피사리, 쇠(소)풀 베기, 벼 베기 등이다. 허리가 펴질 날이 없는 것이다. 농한기라 불린 겨울이라고 한가하지는 않았다. 장농 깊이 넣어뒀던 무명 솜바지를 꺼내 입고 지게를 메고 산으로 향했다. 장작에 쓸 나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찬바람이 휘날리는 날 나무를 하면 꽁꽁 얼은 손은 얼어 터져 피가 나기 일쑤였다. 나무와 가시에 긁히는 것도 다반사였다. 까마귀손에 피범벅 된 형국이었다. 장갑을 낀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그렇게 한겨울 식전에 나무를 해다가 일부는 집에서 취사용과 난방용으로 썼지만 대다수는 오일장에 내다가 팔아야 했다. 저녁에는 아버지와 함께 가마니와 짚신 짜기를 했다. 그때가 겨우 정진동의 나이 12세였다. 이 고역은 18세까지 이어졌다. 이런 이유로 정진동은 17세에 일 년 동안 남의 집 머슴을 하기도 했다. 대(代)를 이어 머슴살이를 한 것이다.
그의 젊은 시절 소처럼 묵묵하면서도 열심히 일했던 모습을 증언한 이가 있다. 박응순(1935년생)은 정진동이 "동네에서 말 잘 듣고, 일 잘하고, 머리 좋기로 소문난 청년이었다"고 기억한다.
정진동의 어린 시절 한국 사람 대부분은 굶기를 밥 먹듯이 했다. 그렇지만 정진동과 그가 살았던 충북 청원군(현재의 청주시) 옥산면 호죽리 도람말은 특히나 그랬다. 너무 가난해 맨 간장에 꽁보리밥만 먹어도 "꿀맛이다"라는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어쩌다 쌀밥이라도 먹게 되면 뺏어 먹을 사람이 없어도 뒷광에 숨어서 먹었다고 한다. 당시 호죽리 꼬맹이들이 부른 노래가 당시의 가난했던 상황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갱골에서 개를 잡아 / 도람말에서 돌돌 궈서 / 한천동에서 한 첨 두 첨."
위 노래에 나오는 갱골, 도람말, 한천동은 호죽리의 자연마을이다. 개를 잡아 구어서 실컷 먹고 싶다는 마음을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성경 암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