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사대가 파손한 정진동 자택.
청주도시산업선교회
자신들이 영원한 '갑'이라고 생각했던 택시회사 사장들은 '을'의 반란(총파업)에 당황했다. 특히나 택시 기사 대부분이 운행을 멈추고, 청주산선에서 장기농성하며 날이면 날마다 데모질을 해대니 말이다.
살면서 누구에게 아쉬운 소리 한 번 안 한 이들이었기에 국회의원 앞에서도 큰소리를 쳤고, 적지(敵地)인 청주산선에서도 정진동과 노동자들에게 백기(白旗) 투항을 요구했던 것이다.
한편 사장들은 청주산선 정진동 목사와 조순형 전도사(1949년생)를 '제3자 개입금지법' 위반으로 고소했다. 제3자 개입금지 문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전국적으로 공론화됐으며, 이후 헌법소원까지 가게 됐다. 그런데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을'들의 희망이자 트러블 메이커인 정진동을 혼쭐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30여 명의 불청객들이 봉고차에서 내려 까치발을 하고 움직였다. 큰길에서 골목길로 접어든 이들은 목표물인 기와집으로 이동했다. 인솔자의 "저 집이여"라는 목소리에 불청객들은 각자 소지한 비닐봉지를 점검했다.
이들은 고무장갑을 끼고 목표물인 청주시 사직동 360-8번지 기와집에 비닐봉지의 내용물을 꺼내 지붕에 던지기도 하고 벽에 바르기도 했다. 악취가 진동했다. 비닐 안의 내용물은 다름 아닌 썩은 생선내장과 계란, 새우젓이었다.
당시 집에서 혼자 있다가 봉변을 당한 이는 정진동의 배우자 조정숙(1935년생)이었다. 비명을 질렀지만 폭력배로 보이는 이들 수십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본 이웃 주민들은 공포에 떨며 정진동의 집에 얼씬하지 못했다.
1시간여 동안 행패를 부린 이들이 물러가서야 이웃들이 코를 쥐고 한둘 나타났다. 훗날 불청객들을 실어나른 봉고차가 Y 택시회사 관리자의 것으로 드러났다. 그렇기에 불청객의 정체는 택시회사 관리자와 그들이 고용한 폭력배였다. 이날의 행동대장 Y 택시회사 관리자는 교도소 신세를 져야만 했다.
다음날인 1988년 7월 23일 사건은 재연됐다. 청주산선 교인이자 민가협(민주화실천가족운동협의회) 회원이기도 한 이영자가 "사모님이 걱정된다"며 외손주를 데리고 와 있을 때였다.
전날과 비슷한 시각 또 한 번의 난동이 반복됐다. 이번에는 쇠파이프로 유리창이 파손되고 거실문을 통해 깨진 보도블록과 돌맹이가 날아들었다. 조정숙과 이영자가 비명을 지르며 돌맹이를 피하며 왔다갔다 하는 사이에 전쟁 아닌 전쟁은 멈췄다.
그런데 잠시 후 이영자가 '악'하며 기겁을 했다. 자신의 외손녀 윤도화(당시 4세) 머리 근처에 어른 주먹만한 돌맹이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불과 몇 센티미터 차이였다. 하마터면 대형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불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