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 선생 묘
김종신
남명의 사후에 그를 추모하고 경모하는 많은 제문 중 문목공(文穆公) 정구(鄭逑)의 제문이 남명(학)의 특징을 가장 잘 형용한 것이라는 평이 따른다.
천지의 순수하고 강건한 덕을 받고, 산과 강의 맑고 맑은 정기를 한 몸에 모아 재주와 지식은 일세를 눌렀고, 기개는 고금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지혜는 충분히 천하의 어떠한 변화에도 대응할 만했고, 용맹은 삼군을 지휘하기에 충분했다.
태산처럼 웅장한 기상으로 천길 벼랑에서 옷깃을 흩날리고, 봉황이 비상하는 듯 고상한 뜻과 지향은 구만리 넓은 하늘에 막힐 데가 없었다.
어려서는 문장을 본업 삼아 온갖 서적을 널리 통달하더니 마침내 우리들의 할 일이 이에 있지 않다 깨닫고 '자기수양을 위한 학문'인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념했다.
은거하면서 뜻을 세우고 문 밖 출입을 삼가면서 학문을 쌓았으니, 선생님은 성실과 신의를 근본으로 하고, '정신수양'(敬)과 '정의실천'(義)을 위주로 수련하여 세월이 오래 됨에 함양이 깊고 근본이 굳게 서서 일상의 어느 사리에도 어긋남이 없었다.
선생님의 수도는 천신만고 끝에 얻어진 것이어서 그 지조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굳건했을 뿐 아니라 일찍이 사회도덕과 민생구제 그리고 국방안전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세상에 선생을 아는 이가 드물어, 자칭 잘 안다는 사람도 선생을 고작 산속에 은둔한 선비 부류라 칭하고, 모르는 자는 감히 험담까지 했다.
슬프다. 선생의 탁월한 안목과 대범한 기개와 높은 학문, 꾸밈없는 기량을 그들이 어찌 만의하나나 헤아릴 수 있으랴. (주석 1)
주석
1> 김충열, 앞의 책, 95~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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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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