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의회 시작전달하고 토의할 것이 많았지만 우선 별명을 함께 나눴다.
안사을
일에 지치고 사람에 치여 귀찮은 요구에 대해 싫은 내색을 할 만도 하건만, 정말 고맙게도 모두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별명과 작명 이유에 대해 나누기 시작했다. '별헤'라는 별명을 말한 나를 처음으로 하여 반시계 방향으로 발언권이 돌아갔고, 교장 선생님께서 바통을 이어받았다.
"제 별명은 예전부터 호빵맨이었어요."
"호빵맨? 닮았다. 많이 닮으셨어요."
"딱이네. 딱이야."
모두 하나같이 작은 웃음을 터트릴 만큼 교장 선생님은 정말 호빵맨처럼 생겼다. 청년도 아닌 사람이 양 볼에 항시 띤 홍조도 그렇고, 살찐 체형이 아닌데도 절대 갸름하지 않은 얼굴형도 그렇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작명의 이유는 다른 데에 있었다.
"호빵맨은 자신의 얼굴을 뜯어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죠. 정말 멋진 친구입니다. 호빵맨은 세균맨과 항상 싸우지만 그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행동과 존재를 분리하는 캐릭터이지요. 자신을 공격하는 존재이고 다툼의 상대이지만 호빵맨은 세균맨이라는 존재를 존중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교훈을 호빵맨이 먼저 실천하고 있었다니, 새로운 발견이었다. 특히 열두 번도 바뀐다는 청소년들을 대하는 우리로서 꼭 필요한 마음가짐이기도 했다.
연이어 들어 본 다른 선생님들의 별명 또한 재미 속에 숨겨진 의미가 많았다. 큰 원을 그려 앉은 우리의 안에 점차 따뜻한 햇살이 드리우는 듯했다. 일상에서는 알지 못했던 내면을 발견하기도 했고, 혹은 평소 모습이 별명으로 확연하게 드러나는 상황에 웃음을 짓기도 했다. 인상 깊었던 별명을 몇 개만 나열하자면 아래와 같다.
연두: 숲이나 나무, 풀들을 보면 보는 그 자체가 행복하고 자연이 주는 선물에 감동을 받아서.
양파소녀: 까도 까도 매력이 넘치는 소녀같은 사람. 나를 알려고 하면 까봐야 한다. 가장 안쪽에 중심, 힘이 있다. 죽지 않고 팔팔 살 수 있는 힘이 거기에 있다.
하하: 우리 인생이 웃을 일이 있어서 웃겠느냐. 웃다 보면 웃을 일이 생긴다. 일본어로 엄마를 '하하'라고도 하고. 어찌 '하'의 한자를 따기도 했다.
바다사자: 아주 오래된 별명. 강치를 바다사자라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 독도에서 멸종한 강치. 독도 생각을 할 때마다 강치 생각이 난다. 내 모습과 비스무리하기도 하고..
큰 변화를 예고하다
한바탕 웃기도 하고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다 보니 금세 모든 이의 별명을 나누었다. 이제 주된 안건 협의를 시작할 때가 되었다. 2025학년도부터는 2022 개정 교육과정을 적용하는 학년이 입학하기 때문에 새로운 지침에 따른 교육과정을 짜야 한다. 더 복잡한 것은 1학년은 2022 개정 교육과정을, 2학년과 3학년은 2015 개정 교육과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교육과정이 중첩되어 돌아가는 것은 교육과정이 바뀔 때마다 있는 익숙한 일이기도 하다. 보통 수업시수가 많이 달라지는 등의 영향이 발생한다. 그런데 이번에 있을 변화는 대변혁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만큼 커다랗다. 일명 '고교학점제'가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것이다.
고교학점제를 가장 잘 요약한 표현은 바로 '대학교처럼'이라는 말이다. 학생들은 학교가 제공하는 필수 과목을 들으면서 또한 자신이 듣고 싶은 과목을 신청해서 듣는다. 개인별로 시간표가 달라질 수 있으며 공강 시간이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상상처럼 학교를 운영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교사 수도, 교내 공간도 턱없이 부족하다.
또한 졸업을 위해서 들어야 할 학점의 수가 정해져 있으며 미이수 등으로 인해 학점을 채우지 못하면 졸업할 수 없다. 현재까지는 수업일수만 채우면 진급할 수 있었지만 고교학점제 체제에서는 각 과목별로 필수 이수 조건을 채워야 이수할 수 있다. 언뜻 들어도 고등학교 현장이 매우 달라진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우리 학교(대안교육 특성화 고등학교)에서 가장 피부에 와 닿는 변화는 '본격적인 학기제로의 전환'이었다. 쉽게 말하면 한 과목을 한 학기에 마쳐야 하고, 한 번 들은 과목은 다시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떠한 변화를 가져다주는지 예를 들어서 설명하겠다.
우리 학교는 지금까지 국어, 영어, 수학을 한 학년에 한두 시간만 배치해왔다. 예를 들어 국어는 총 세 시간을 배우는데 3개 학년에 걸쳐 한 시간씩 공부했다. 대신 낭독이나 문화예술 같은 대안교육 전문교과를 더 배운다. 아이들의 학습 부담을 낮추고 공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방편임과 동시에 보다 실제적인 지식을 체득시키기 위함이다.
그런데 2025년 신입생부터는 국어, 영어, 수학, 사회, 한국사, 과학을 무조건 한 학기에 3시간씩 들어야 하는 운명에 처했다. 2, 3학년 때 다양한 선택과목을 신청하기 위해 1학년 때 모두 들어야 하기도 하고, 학기제의 조건을 채우기 위해 한 학기에 한 과목을 모두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