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미경 대전유족회장이 대전골령골 검은 비석 앞에서 통곡하는 모습
김영희
차를 돌려 위령제를 지낸 매장지 골령골 찾았지만,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검고 조그만 비석만 저를 기다리고 있었시유. 저는 비석을 끌어안고 한동안 울었시유. 현수막을 뒤늦게 봐, 위령제를 지낸 후였시유. 그때 결심했시유. 이제부터라도 열심히 아버지 위령제를 모실 것을 다짐하면서 발길을 돌렸시유. 그해 추석 2002년 9월 21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차례를 지내고 대전 산내 골령골에 간단한 제물을 가지고 도착하니 8시경이 되었시유. 제물을 펼쳐놓고 큰절을 올렸어요. 그리곤 오후 늦게까지 기다려 보았지만, 유족은 한 명도 오지 않았시유.
어찌 이곳에서 7000여 명의 학살당했건만 명절인데 유족이 한 명도 찾아오지 않는 걸까. 허탈한 심정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와 그때부터 위령제 주최단체를 수소문 했시유. 그해 11월 딸이 여러 시민단체를 수소문한 끝에 '대전 참여연대'에 연락해서 2개월 만에 유족 문양자씨를 만나게 되었시유. 그리하여 '대전유족회'를 결성했고 매달 유족회의 및 위령제를 지내는 모든 제물과 점심을 부여에서 준비해 트럭에 싣고 가서 위령제 행사를 했시유. 유족회 활동에 모든 것을 바쳤고 그게 아버지 명예 회복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길이라 생각했시유."
1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출범 소식
- 1기 진화위는 어떻게 인연이 되었습니까?
"그게유! 고 노무현 대통령 시기 1기 진화위가 대통령 상설기관으로 출범되면서 유족회에서 그 소식을 듣게 되었시유. 저는 아버지 명단을 찾기 위해 진화위에 쫓아다녔시유. 2006년 3월 14일 아버지 전재흥의 '진실규명 신청서'를 제출한 후 어느 날 등기가 와서 받아 보니 진화위에서 온 우편물이었시유. 허둥거리며 우편물을 뜯어 보니 기절초풍할 내용이 담겨 있었시유."
-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전재흥은 대전형무소에서 사망했지만, 공권력의 불법성이 입증되지 않아 진실규명 불능으로 결정한다는 내용이였시유. 아버지가 경찰서에 끌려가서 대전형무소 수감돼 있다가 학살된 것이 분명한데 왜 진실을 규명할 수 없다는 걸까?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시유. 정신을 차리고 불능 처리된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봤시유. 군법회의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아서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시유. 이때부터 저는 투사의 역할을 자임했시유.
진화위에서 불능 통보받은 2010년 10월 29일로부터 일주일도 안 돼 그는 이의신청서를 제출했다.
요지는 "1951년 진행된 군법회의는 불법적이며 위헌적이다"라는 것이었다. 즉 제헌헌법에 군사법원과 같은 특별법원에 대한 규정이 없고 군사법원은 1954년에 관련법이 만들어지면서 합법화되었기 때문이다. 예외로 진화위는 최능진(독립운동가)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바 있다. 국방경비법 위반으로 1951년 1월 20일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아 그해 2월 21일 사형집행 된 최능진은 법적 근거도 없는 군법회의에 의해 사형을 당했기 때문에 불법적인 학살을 당했다는 결정을 받은 바 있다.
"이러한 예외 조항으로 똑같은 사건의 전재흥 역시 불법적인 군법회의(군사재판)에 의해 판결되어 죽음에 이르렀기에 진실규명되어야 할 일이잖아유. 근디 최능진은 진실규명이 되었고 전재흥은 불능 처리된 것은 형평성에 심대한 오류가 발생한 것이지유."
청천벽력 같은 소식
- 그랬군요. 정말 억울하셨겠어요.
"예, 그래서 아버지 명단을 찾기 위해 부여군청 그리고 대전 형무소 찾았지만 역시 명단은 없었시유. 다시 대전 국가기록원을 몇십 차례 방문해 찾았지만 역시 명단은 없었시유. 국가기록원 직원이 저를 보고 안타까웠는지 '그럼 육군본부로 한번 가보세요'라고 해서, 바로 육군본부로 발길을 돌렸시유.
2010년 10월 6일 육군본부에 도착해 신분증을 제출하고 명단 신청했시유. 조금 있으니 담당자가 출장가서 확인이 안 된다고 하대유. '출장을 가면 업무를 대행하는 직원이 있을 텐데 무슨 말씀이래유' 했더니 잠시 기다리라고 하곤 전화한 후 '아버지 판결문이 있다'고 하더라고유! 그러면서 시간이 좀 걸리는데 괜찮으시겠냐고 허길래 '야! 괜찮어유! 저는 60년도 기다렸는데 뭘 못 기다리겠냐'고 하면서 의자에 누워버렸시유.
한참을 기다리고 있는데 지프차를 타고 온 장교가 봉투를 내밀면서 직원에게 전달했고 곧 판결문은 제 손에 들어왔시유. 판결문은 30쪽 분량으로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었어유. 앞면과 뒷면이 복사돼 있었고, 펜촉 글씨와 한자로 기록되어 있었시유. 아버지가 강압수사와 모진 고문으로 누명을 쓰고 '살인자'로 판결된 것을 확인하는 순간 놀랐어유. 그동안 아버지는 보도연맹 활동으로 학살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말이에유.
갑자기 살인자라니, 청천벽력같은 판결이었어유. 하늘과 땅이 맞닿는 듯 하앟게 보였시유. 육군본부 앞 벤치에 앉아있는데 판결문을 가슴에 안고 한없이 눈물이 쏟아졌어유. 평소 잘 울지만, 그날 만큼 슬피 울어 본 적 없었시유. 눈물이 앞을 가려 육군본부에서 부여 집까지 40km를 어찌 자동차를 끌고 왔는지 기억이나지 않아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