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성고개 아랫법륜골 매장지 근경
김영희
1960년 4.19혁명 후 유족회 운동이 전개되자 <영남일보> <대구일보>에는 '한국전쟁기 학살사건에 대한 보도'가 줄을 이었다.
유족들의 기세에 눌려 이승만 하야 후 자유당도 양민학살진상조사특위를 만드는 작업에 들어간다. 하지만 학살 사건을 관장한 경찰국장이나 국회의원 등이 현직에 근무하고 있었던 터라 조사는 가해자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뤄졌다. 이에 유족들은 전국적으로 조직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유족들의 입을 틀어막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자를 '빨갱이'로 취급하고, 각 지역 유족회장 등을 감옥에 수감한다.
살벌한 분위기에 40여 년간 조용히 지내던 이들은 1999년 9월 <AP통신>의 '노근리 민간인 학살사건' 보도를 계기로 2000년 1월 20일 '경남유족대책위원회(대책위)'를 결성한다. 노근리 사건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7월 25일부터 29일까지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사건이다.
대책위는 같은 해 3월, 마산역에서 대대적인 위령제를 거행한다. 당시 경남 곳곳에서 관심 갖기 시작하면서 학살지의 증언이 속속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후 2004년 5월 3일, 경남대 발굴팀은 한국전쟁 민간인 학살지인 마산 여양리 발굴 상황이 언론에 보도되자, 경남 서부지역 내 학살지를 알고 있거나 학살당한 자의 유족들이 가슴 속에 품었던 응어리를 풀고 제보에 나선다.
이상길 교수는 이들의 증언과 대책위에서 제보한 11군데의 매장지에 대해 사전 조사를 실시, 자료를 참고로 발굴 대상을 선정한 후 작업을 시작하였다. 발굴이 시작되고 해당 사건이 언론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문산읍에 거주하던 이봉춘 할머니도 발굴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이 할머니는 "우리 밭(상문리 274번지, 아랫법륜골)은 왜 빠졌노!" 하면서 아들에게 전화해 진실화해위원회에 알리라고 한다. 진성고개는 처음 조사에서 제외된 곳이었으나 할머니의 제보를 통해 발굴이 시작되었다.
이봉춘 할머니를 찾아 나서다
이상길 교수의 논문에는 '이봉춘 할머니를 오랫동안 기억해야 한다'는 글이 남겨져 있었다. 이에 필자는 이 할머니를 찾아뵙기로 마음먹고, 일부 유족분들께 근황을 여쭤봤다. 돌아온 답변은 그야말로 충격이었다.
"돌아가셨어요."
"치매 걸리셨어요."
'정말 돌아가셨으면 어떡하지'하는 마음이 조급해졌지만 문제는 할머니가 과수원 소유자라는 것 외에 집도, 전화번호도, 주소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일단 몸으로 부딪쳐 보기로 하고, 무작정 진성고개(아랫법륜골) 발굴장을 찾아갔다. 발굴지는 거의 사람이 다니지 않는 묘한 골짜기에 위치해 있었다.
한국국제대학교 옆 구 2번 국도 도로변에서 150m 정도 올라간 입구에 법륜사라는 사찰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10m 정도 더 들어가 차를 세운 후, 인기척이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