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반티'를 도화지 삼아 자신을 표현했다. 사진의 내용은 '너 보고 싶어'라는 고백을 재치있게 표현해놓은 것이다.
서부원
또, 자신의 장래 희망이나 다짐을 적거나 자신이 속한 동아리의 홍보 수단으로 삼는 모습도 보인다. 직접 친구를 찾아가 말하기 데면데면했던지, 등 뒤에다 사과의 문구를 새긴 아이도 있다. 여자친구의 이름을 적거나 특정 선생님을 향한 사랑과 존경심을 드러내는 경우도 있다.
고백하자면, 지금껏 학급 담임을 맡을 때마다 반티 제작에 반대해 왔다. 학년 초 아이들과의 첫 만남 때부터 미리 명토 박을 정도였다. 체육대회 때 말고는 입을 일이 거의 없어 쓸데없는 낭비라고 생각했고, 자칫 교실 내에 강압적이고 획일적인 문화를 확산시킬 수 있다고 봤다.
돈도 돈이지만, 한 번 입고 버릴 거라면 환경에도 해를 끼치게 될 터다. 사회나 환경 교과 수업 때, 옷 한 벌을 만드는 데도 엄청난 물과 에너지가 소비된다는 걸 배운다. 그런데도 모든 학급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꼭 필요하지도 않은 반티를 맞춘다는 건 반교육적이라고 여겼다.
무엇보다도 소수일지언정 축구를 싫어하고 반티 살 돈이 아깝다는 아이들이 느닷없이 배제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일률적 강제 구매는 아니라고 하지만, 대다수가 반티를 입는 상황에서 선뜻 홀로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울며 겨자 먹기일지언정 다수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다.
체육대회 때 학급별 단합을 위해 맞춘 반티가 본의 아니게 차별과 배제의 수단이 될 수 있다는 점이 찜찜했던 거다. 올해엔 무기명 투표를 해서 단 한 명이라도 반대하면 반티를 맞추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아이들은 토론과 설득을 거쳐 만장일치를 봤고, 나 또한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티가 불러온 뜻밖의 토론
그런데, 올해 체육대회를 지켜보면서 반티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앞서 말한 대로 반교육적인 측면이 없진 않지만, 그걸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긍정적인 효과도 있다는 걸 깨달아서다. 비단 반티뿐이랴. 뭐든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독이 될 수도, 약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배웠다.
반티 제작 여부부터 디자인 선택과 가격대에 이르기까지 아이들끼리 숱한 회의를 거쳤다. 회의 과정의 치열함과 진지함은 여느 때의 그것과 사뭇 달랐다. 평소 말수가 적은 아이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학급 단톡방에서도 다수결에 앞서 다양한 의견들이 활발히 개진되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반티에 새겨진 해당 축구팀 유니폼의 디자인과 로고가 상표권 침해에 해당하지 않는지가 도마 위에 올랐다. 만약 누군가 반티를 입고 있는 모습을 사진 찍어 자신의 SNS에 탑재한다면, 법적으로 처벌받을 수도 있지 않으냐는 거다.
어차피 '짝퉁'이라 문제 될 게 없다는 이야기부터, 처벌해야 한다면 인터넷을 통해 버젓이 판매하고 있는 업자의 책임이라는 주장까지 오갔다. 뻔히 상표권 침해인 줄 알면서도 구매하는 소비자도 문제라는 반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반티가 상표권 관련 공부의 소재가 된 셈이다.